[국제관계사] 신성동맹과 유럽협조체제
- 최초 등록일
- 2002.11.12
- 최종 저작일
-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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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신성동맹의 형성과정
◐신성동맹의 내용과 해석
◐부정적인 평가
◐긍정적인 평가
◐유럽 협조체제
◐유럽협조와 회의외교
1. 엑스-라-샤펠(Aix-la-Chapelle)회의(1818.9~11)
2. 트로파우(Troppau)회의(1820.10~12)
3. 라이바하(Laybach)회의(1821.1~5)
4. 베로나(Verina)회의(1822.10~11)
◐유럽협조체제의 위기
본문내용
이 동맹의 골자는 ‘각 국의 군주가 성서 말씀을 바탕으로 서로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서로 돕고, 자기 나라의 신민(臣民)에 대해서는 가부(家父)와 같이 동포애의 정신에 따라 이를 지도하며, 신앙·평화 및 정의를 옹호한다’는 내용의 지극히 관념적·비현실적인 것이었으나, 알렉산드르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터키 황제와 로마 교황, 그리고 영국 왕 이외의 모든 유럽의 군주가 이 동맹에 참가했다.
영국의 섭정(뒤에 조지 4세)은 그 취지에 찬성하지만, 영국의 국법이 대신의 부서(副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유로 가맹하지 않았고, 로마 교황은 가톨릭과 합치하지 않는 신교(新敎) 제파(諸派)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가맹을 거절했다. 터키 황제는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참가를 요청 받지 않았다. 이렇게 이루어진 신성동맹은 제창자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군주들은 그 실효성을 의심하였다. 메테르니히는 빈 체제 유지를 위해 4국동맹(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영국 사이의 동맹)과 함께 신성동맹을 이용하여 각 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이 동맹은 먼로 선언과 중남미 여러 나라의 독립으로 타격을 받았으며, 그리스 독립을 둘러싼 각 국의 이해 대립으로 1825년 전 유럽적 체제로서의 동맹은 와해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