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촌락장적에_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2.02.28
- 최종 저작일
- 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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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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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신라 촌락문서의 작성 연대 문제
Ⅲ. 신라 촌락문서를 둘러싼 나머지 문제들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신라 촌락문서1)은 1933년 일본 고대황실 보물창고인 정창원(쇼쇼인)이란 곳에 보관된 《화엄경론제7질》이라는 불교경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경전을 쌌던 닥종이 두루마리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문서 2편에는 각 편에 2개 촌씩 전체 4개 촌의 戶口, 牛馬, 田畓, 經濟林의 상황이 상세히 집계되어 있다. ‘화엄경론제7질’이라는 제목이 써있는 경질의 표편에는 當縣 소속의 沙害漸村(이하 A촌으로 약칭)과 역시 당현 소속인 薩下知村(이하 B촌으로 약칭)이 기록되어 있고, 이편에는 군현과 촌명 부분이 결실되어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실명촌(이하 C촌으로 약칭)과 촌명의 판독이 어려운 서원경 소속의 촌(이하 D촌으로 약칭)이 기록되어 있다.
촌이란 신라 지방 통치구역 중에서도 지금의 도에 해당하는 주와 군, 현 아래에 놓여있던 가장 말단 행종 조직으로 지금의 면이나 리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촌락문서는 서원경 부근의 4개촌의 전반적인 상황을 기록한 셈이다.
이 촌락문서의 1편 서두를 옮겨보면, “이 현 소속 사해점촌을 바라봄에 산이 둘레 5720보가 되고 공연은 합하면 10이 되고 …”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신라 촌락문서는 촌별로 면적과 인구에 대한 전체적인 개요을 설명한 다음 세부로 들어가 연령별, 남녀별 인구가 각각 얼마이며, 소와 말, 유실수의 숫자가 얼마인지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같은 후대 문헌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기의 사회경제상을 밝히는 데 얼마나 중요한 사료인가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도 신라인에 의해서, 신라인을 위한, 신라인이 직접 작성한 문서라는 점에서 사료적인 가치가 다른 무엇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크다.
이런 중요성만큼 한국과 이것이 발견되어 소장되고 있는 일본을 중심으로 이를 바탕으로 한 많은 연구 논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두 편의 문서를 둘러싼 결론을 어느 한 군데서도 일치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연구자들간에 견해가 확연하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