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국 사회` 제 2장 요약 및 비평
- 최초 등록일
- 2011.08.12
- 최종 저작일
- 2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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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세기 중국 사회 제 2장 요약 및 비평 레포트입니다.
직접 읽고 요약, 비평했기 때문에 중복은 없습니다.
30명 듣는 수업에서 중복 안나왔습니다. 직접했으니까 당연한 얘기일수도....?? ^^;;
그럼 수고하세요~ ^^
목차
없음
본문내용
전통시대, 특히 남경조약 이전에 중국의 대외관계는 보통 중화적 세계질서라고 불러왔다. 1842년에 청국과 영국 사이에 맺은 남경조약이란, 국방상의 안전과 무역을 중시한 중국 중심의 조공질서와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형성된 이른바 ‘만국공법’적인 무역질서의 충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한다면, 19세기 후반기에 중국을 둘러싸고 전개된 국제질서는 무력을 통해 무역상의 이익을 확대하려는 산업 국가들과, 조공질서라는 전통적인 국제관계의 틀을 유지하면서 무역상의 이익을 취하려는 중국과의 조정을 통해 형성된 질서였다고 할 수 있다.
1860년에 체결한 북경조약은 중국 노동자의 이민허가와 천진의 개항, 구룡반도의 할양, 교회건립지의 확보라는 큰 소득을 구미국가에게 안겨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서구국가와의 관계를 조공의 틀 속에서 이해하는 데 한계가 온 것이다. 이제 청국은 조약의 쌍무적 의무이행을 위해, 조약을 맺은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중국적 세계질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교와 관련된 제도가 1840~50년대보다 완비되었다고 해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구미적 국제질서로 전환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184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청조는 유럽이 강요하는 국제질서에 점차 편입되어 갔다. 이것은 청조가 경제적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서구열강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한 결과였기 때문에, 청조로서는 국가의 위기를 갈수록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심화는 조공국에 대한 정책의 변화로 나타났다. 조공국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청의 국제관계는 한 마디로 조공국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의 안전을 지킨다는 입장이었다. 유구는 일본과 분도 균점으로 해결하려 하였고, 월남 역시 분계안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 하였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여, 직접 지배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이것은 청제국도 식민지체제를 수용하면서 조공국가에 강요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중국의 국제질서는 구미열강이 강요한 조약체제를 수용하면서, 조공국가에게는 가능하면 그러한 체제에 자국의 이익까지 얹어서 강요한 또 다른 식민지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19세기 중국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