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과 천주교
- 최초 등록일
- 2010.03.20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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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학과 천주교
목차
Ⅰ. 머리말
Ⅱ. 서학의 도입과 수용
Ⅲ. 천주교 박해과정
Ⅳ. 서학과 천주교가 조선후기에 미친 영향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조선후기 사상계에는 정학(正學)으로 불리던 성리학과 실학(實學) 그리고 지배층에 의해 사학(邪學)으로 지탄받던 여러 사상들이 병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들 가운데 서학은 척사위정론의 연장선상에서 사학으로 규탄하며 조선왕조 정부에서도 약 1백 년간에 걸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행했다.
일반적으로 볼 때 한 사상에 대해 강력한 탄압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 사상의 전파는 위축되거나 중지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천주교의 경우에는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교세의 성장이 이루어졌는데 과연 어떠한 요인이 그러한 맥락을 이끌었는지 그 도입과 전래, 박해과정 및 의의 등을 짚어보며 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Ⅱ. 서학의 도입과 수용
서학(西學)은 본래 중국을 통해 서양 선교 신부들이 전해줬던 서양의 종교, 윤리와 과학, 기술 등에 대한 연구를 통칭한다. 조선의 서학은 16세기 부경사대사행원(赴京事大使行員)들이 북경에서 중국의 서학과 접촉하여,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 서양 과학 기술 문물이 도입되고, 이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에서의 열독과 관찰로 서양과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면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 알아보았다. 서학은 본래 서양의 학문으로서 조선에 전래되었으나 후에는 학문과 종교로 나뉘고, 종교적인 부분은 천주교로서 심화되어 조선 후기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 깊이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 신앙은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지도이념에는 배치되었고, 조선 왕조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지배층에서는 이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탄압을 강행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학이 계속하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만인들이 던지는 의문에 그 나름대로 응답하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기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천주교 신앙이 조선후기 사회를 재편하고 그 발전을 위해 발휘하던 기능은 순기능적 측면만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후기 서학도들이 가지고 있던 체제 부정의 논리는 조선왕조에 대한 직접적 거부로 나타나기도 했고, 이 경우에는 흔히 외세와 결탁이 논의되기도 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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