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청나라의 개항
- 최초 등록일
- 2009.06.01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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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세기 청나라의 개항을 접한 조선인이 직접 청나라를 방문해 보고 들은 것을 서술한 것입니다. (산업과 문물 중심으로)
목차
-근대 문물을 접한 조선인-
-변화된 청나라의 사회-
본문내용
- 글쓴이는 중국의 개항을 접한 조선인으로 정했고 중국의 근대 문물과 중국 사회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뤘습니다. 설정한 조선인은 중국의 개항소식을 접하고 중국을 직접 방문한 사람으로 설정 했습니다.
-근대 문물을 접한 조선인-
청나라에 큰 화(아편전쟁)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말하길 이것은 삼천년미유지화(三千年未有之禍) 칭하였다. 중국 역사 삼천년 이래 없었던 화라 말하는 것을 듣고는 심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청나라가 서양 오랑캐들에게 개항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믿지 않았지만 그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정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개항장에는 많은 서양인들이 있었고 그 모습도 너무나 변해 20년 전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청나라의 신식 공장들은 대부분 광주, 상해, 천진 등지에 몰려있었다. 그 모습은 경복궁보다 웅장했고 컸다. 건물 수도 많아서 조선에서는 비교 될 만한 것이 없었다. 이 곳에서는 주로 신식무기 공장과 조선소가 많았는데 문제는 만들어진 물건들이 한결 같이 품질이 낫다는 것이다. 배는 주로 목선이었고 서양의 배를 모방한 정도라서 그 철선인 서양의 배를 대적이나 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이 갔다. 크기만 크지 우리의 판옥선과 별반 다를게 없어 보였다.
청나라에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광산의 개발도 예전에 비해서 눈에 띠게 증가했다. 지금까지 광산 개발에 소극적이었던 청나라가 아니라 금, 은, 동, 철, 석탄 광산 등을 적극 개발하여 연료와 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조선은 서양에게 광산과 산림 채벌권등 많은 권한(이권) 들을 내주고 있는데 조선정부도 청 정부와 같이 적극적으로 광산 개발에 나서 백성들의 생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청나라의 직포는 서양에서 수입한 물건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진계원이 라는 사람이 ‘계창륭소사창’이라는 직포공장을 세우고 신식 기계로 직포를 생산하여 오히려 서양으로 역수출을 한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로하여 양잠업도 동시에 성황을 누리게 되었다. 조선은 왜에서 들어온 방직물 때문에 여인들의 생업이 무너지고 쌀이 계속 왜로 유출되고 있는 현실에서 청나라의 이런 모습은 한 사람의 조선인으로서 너무나 부럽기만 할 뿐이다.
참고 자료
<19세기 중국사회> 신승하, 유장근 장의식 공저. 출판사: 신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