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거류지 무역의 전개와 청일 상인의 상권경쟁
- 최초 등록일
- 2022.06.03
- 최종 저작일
- 20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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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거류지 무역의 전개와 청일 상인의 상권경쟁"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자율/진로활동-탐구계획서
2. 탐구활동-보고서
3. 활동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
4. 보고서 요약
본문내용
1. 탐구 동기
조선시대 후기인 19세기 후반부터는 조선의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1864년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통해 당시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세도정치 타파, 서원 철폐, 호포법 실시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 개혁은 어디까지나 구식 질서를 지키기 위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며, 당시 서세동점으로 대변되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이후에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1876년부터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까지를 거류지 무역 시기라고 한다. 이 시기는 일본이 조선의 무역을 독점하던 시기로 일본은 조선의 쌀, 콩, 쇠가죽 등을 주로 수입해가고, 면직물을 조선에 수출하여 갔는데 이를 미면교환체제의 무역구조라고 한다. 이런 미면교환체제는 추후에 조선경제의 자생력을 무너뜨리고 임오군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조선후기에 큰 영향을 주었던 거류지 무역에 대해서 관심이 가서 거류지무역이 일어나게 한 강화도 조약의 배경과 거류지무역의 형태와 조선에 미쳤던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추가로 거류지무역이후의 미면교환체제 도입으로 일어난 임오군란 이후의 청일 상인의 상권 경쟁에 대해서 탐구해보고자 한다.
2. 강화도 조약의 배경
강화도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로, 1876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1875년 자국 군함을 동원하여 영해에 불법 침입하여 무력 시위인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이를 빌미 삼아 1876년 1월 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정한론자도 조선 개혁론자도 있었는데,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 운요호 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란 구실로 1876년에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부사로 보내서 교섭이 진전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참고 자료
http://pub.chosun.com/client/article/viw.asp?cate=c03&nNewsNumb=20170424172
https://gabs.tistory.com/entry/%EC%A1%B0%EC%84%A0141%EA%B2%BD%EC%A0%9C%ED%9D%90%EB%A6%84%EC%9D%84-%EC%95%8C%EC%95%84%EB%B3%B4%EC%9E%90
http://cyberschool.co.kr/html/text/khis/khis631.htm
https://lahistoria.tistory.com/53
https://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0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