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택후의 문학관에 대해
- 최초 등록일
- 2009.05.23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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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후기 무신이자 시인이었던 황택후의 문학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100% 문헌에 의존한 자료입니다.
목차
황택후(黃宅厚, 1687~1737)에 대한 짧은 소개.
華谷集序
本論
1) 기행을 하며
2) 계절을 담아
3) 벗에게 띄우는 노래
4) 풍광을 노래하며
5) 가족을 그리워하며
6) 역사를 회고하여
結論
본문내용
황택후(黃宅厚, 1687~1737)에 대한 짧은 소개.
황택후의 본관은 창원이며 초명은 황택중이고 자는 자화, 호는 화곡이며,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고려 때 창원백이었던 충준(忠俊)의 후손이기도 하다. 그의 조 종수(從壽)는 동추였고 부 계립은 통덕랑을 지낸 사람이다. 화곡은 5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7세에 동몽선습, 8세에 사약을 배우는 등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익혔다. 10세 때부터 곤륜 최창대(崔昌大)에게 수학하였다고 한다. 30세 때는 강화에 머물면서『심주녹』을 쓰고, 32세에 금위영의 서리가 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최창대, 이하곤, 구택규에게 사사하였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도순무사 오명항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1728년 이인좌 등이 영남과 호남에서 일으킨 반란을 토벌할 때 도순무사의 막부에서 서기 활약했으며 특히 무고한 백성들을 많이 구제해 주었다. 44세에『기전록』을 지었고, 45세 때 오천 이종성(李宗城)을 따라가 관서에 머물렀는데 그 집 기실로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그는『관서수창록』을 지었는데, 이것은 거의 대부분 오천과 수창한 시이다. 영남의 잔적을 토벌할 때도 박종사를 따락 많은 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양무원종공신일등(楊武原從功臣一等) 에 올랐으며 부모는 봉증되고 아들 1명은 음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1735년 조풍원이 평안도관찰사로 떠날 때 좌막으로 불렀으며 다음해 첨추로 승진했다. 이해 경기도관찰사 이오천의 부름을 받고 영중의 재부와 군정의 일을 돌보았다. 1737년 북사를 영접하러 가던 중 병에 걸려 죽었다. 죽은 후 한성부좌윤에 추층되었다. 권수에 구상, 이득신, 성덕우, 오태현, 황기천의 서가 있다. 권 : 시 218수(일반시 115, 심주록 20, 관서수창록 83), 권(4) : 문 2편(선고첨지증추부사종한성부좌윤부총관부균형장, 선부군초상의절록), 잡저 4편(유신론, 감물서, 도화동기병팔경시, 축복설). 권말에 이영록의 발이 있다. 부록에는 연보, 가상이 실려 있다. 저서로 <적막창수록>, <화곡집> 등이 있다. <화곡집>은 황택후의 아들 황덕순이 1794년에 편집 간행한 것이다.
먼저 황택후의 문학적 특징을 파악하려면 그의 화곡집 서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華谷集序
이는 즉 황군의 집안이 가난하지만, 김쇄우와 그 아들 덕순이 수습하여 정리한 것이다. 대저 문(文)이라는 것은 사회의 공유물이다. 귀하지 않는 것은 많고, 천하지 않은 것은 적으며, 중국 것이 아니면 화려하고, 먼 곳의 땅이 아니면 비루하니 관직(관직과 작위) 또한 사회의 공유물이다.
참고 자료
조선 후기 위항인의 풍류활동과 문학, 안영길 저, 아세아문화사
朝鮮平民文學史, 第1部 / 具滋均 著, 서울 文潮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