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파 후사가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9.04.20
- 최종 저작일
- 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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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북학파 후사가란
2. 인물연구
1) 박제가
2) 유득공
3) 이덕무
4) 이서구
3. 한객건연집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북학파 후사가란
박지원을 따르며 배운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 이 네 사람은 특히 시로써 나란히 이름이 났다. 유득공의 숙부인 유련이 청나라에 갔을 때 아직 젊은 네 사람의 작품을 모아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시집을 편찬하고, 청나라 문인들이 대단한 찬사를 늘어놓는 서문을 얹어 그곳에서 간행했다. 서문에 있는 말에 근거를 두고 네 사람을 ‘사가`(四家)라고 하는 관례가 생겼으며, 책 이름을 <사가시>(四家詩)라고도 한다. <사가시>는 국내에서도 널리 읽혔고, 후대에는 주석까지 달린 <전주사가시>(箋注四家詩)로 간행되기도 했다. 이 네 사람은 중국의 전례를 되풀이하는 데서 벗어나 한시를 우리대로의 현실감각과 생활감정에 맞는 시로 바꾸어놓으려 했는데, 그 노선이 중국에서의 평가를 앞세워 국내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전대의 이정구·신흠·장유·이식을 사가라도 일컬었었기에 이 네 사람은 전사가(前四家)와 구별해서 후사가(後四家)라 하는데, 전사가와 후사가는 서로 대조가 되는 위치를 차지했다. 전사가는 고문을 확립해 집권층문학의 위세를 떨치면서 중세문학의 수호자 노릇을 했다면, 후사가는 실학의 비판적인 의식에 따라 한시의 기풍을 쇄신하면서 중세문학에다 근대적인 성향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했다 하겠으니, 그 사이에 문학사의 단계가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는 서얼 출신이라 억눌려 지내야만 하는 처지였지만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정조는 반발하는 기질을 받아들여 순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서구는 나중에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는데 자기와 처지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조화를 찾았다. 이 네 사람은 한시를 문학 창작의 본령으로 삼는 관례를 되풀이하면서, 홍대용이나 박지원 만큼 적극적인 혁신을 하지는 않았다.
참고 자료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두산대백과사전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14(근대사상의 맹아)』 탐구당 1981
역사학회 『실학연구입문』 일조각 1997
정조실녹, 청장관전서, 연암집, 귀사당집, 리덕무의 실학사상(리성무, 향토서울 31, 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