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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현대사] 한국전쟁 평가A좋아요
    한국 전쟁과 갈등의 심화과 목 명 : 한국 현대사 연구담당교수 : 엄찬호 교수님발 표 일 : 2001년 10월 29일발 표 자 : 2조 최돈엽(96)박윤영(98)이정은(98)머릿말20세기의 세계현대사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이른바‘냉전의 열전화’를 겪으면서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세계라는 적대적인 두 개의 진영으로 확연히 분립하게 되었다. 이 격변의 와중에서 우리 민족은‘자주적인 통일민주국가’의 건설이라는 8·15이후의 역사적 과제를 실현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두운‘분단시대’의 터널 속을 지나고 있다.과거 적대적인 두 진영의 맹주였던 미·소의 정상이 만나‘냉전시대의 종식’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북은 통틀어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의 삶의 조건과 구조, 그들의 의식까지도 여전히 50년전의 전쟁이 판 박아 놓은‘전후질서’속에 끈질기게 매어있음을 목도하고 있다.현대 한국 사회의 모든 모순의 근원이 오직 한국전쟁으로부터만 유래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민족사의 전개에 전쟁이 남긴 심대한 영향과 깊은 상처의 의미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식지평에 한국전쟁의 구체적 실상과 총체적 상(像)이 객관적으로 포착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에 속한다.이에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정리해보고 한국전쟁의 전반적인 모습을 여기서 다루고자 한다.1. 한국전쟁의 기원과 배경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전쟁의 기원과 주도자, 전쟁의 성격에 대한 현실적 차원에서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전쟁기원에 관한 논쟁은 전쟁과 체제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심리전·선전전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띄었다.(1) 전쟁 기원의 시각 : 전통주의와 수정주의한국전쟁 연구의 시각은 크게 전통주의와 수정주의가 있다. 전통주의적(traditionalist) 견해는 소련을 중심세력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이 세계를 적화하려 한다는, 즉 공산주의의 수출이라는 견지에서 한국전을 해석한다. 따라서 자연히 한국전의 책임은 공산측에 있세력으로서는 소멸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우파노선 인사들은 월남하거나 단정문제에 있어서 북로당을 지지하였다.이상과 같이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결집시키지 못하고 분열됨에 따라 결국 분단국가가 수립되어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② 전쟁전의 남북한 통일정책 비교각기 다른 정부 수립 이후 남북한 공식적인 통일정책은 남한은 북진통일론이고 북한은 평화통일론이었다. 그 중에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은 전쟁과 관련지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이미 해방직후 건준은 해방이후 최초의 한국인에 의한 정치적 결사체로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운형의 이데올로기 전향 시비로 인해 우익이 참여를 거부하면서 통일노력은 좌절된다. 이후에도 건국동맹(최근우, 함봉석), 한국민주당(장덕수, 김병로), 국민당(최석주, 엄우룡), 조선공산당(이관술, 김형선, 안호욱) 등의 대표가 모여 통일전선 결성을 논의하는데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결국 좌·우익의 협동에 의한 통일노력은 1차는 임정추대문제로, 2차는 친일파 숙청여부로 좌절되었다. 이후 찬탁·반탁운동 속에서 좌우합작의 통일 노력의 좌절, 남북협상 노력의 좌절 등으로 이미 통일은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통성 확보 측면의 취약점으로 인해 지속적인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미군의 지원 확보와 더 나아가 실제 무력의 확보를 이루면 북진통일을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대내적으로는 김구와 소장파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평화통일운동을 억압·제거 할수 있다고 까지 생각하였다.이와는 반대로 북한의 지속적인 평화통일 정책은 민주기지론에 기초하고 있다. 민주기지론은 네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첫 번째는 북한에서의 당 건설이다. 소련군과 김일성은 해방 직후에 남북이 처한 서로 다른 환경을 감안하여 서울이 아닌 평양에 당중앙이 수립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10월 중순에 북한에서 수리립된 북조선 분국은 소련군과 김일성의 주장이 점차 관철되어갔음을 반영해준다.두 번째는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와 반으로 제공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서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화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전쟁경제의 해체과정에서 국내 독점자본의 생산기반이 위기에 봉착하고 구내 노동계급 등의 계급운동의 광범한 확산으로 점차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미국경제는 대립의 구도를 전제한다.대외적으로는 1945·1946년 사회주의 진영과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국제주의적 지배전략을 거쳐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함으로써 사회주의 진영과 식민지·반식민지 민중과는 더 이상의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반혁명총노선을 촉구한다. 이시기 미국의 외교정책은 봉쇄정책으로 알려졌으나 내용상 그것은 이미 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권에 대한 직접적인 침략을 포함하는 공격정책이었다. 중국과 소련의 분리와 스탈린과 모택동의 분리 공작의 실패, 공세적인 사회주의권 고립정책과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억압, 독일·일본에서의 역전정책 및 이의 미국 헤게모니체제로 편입 등을 추구하였다.대내적으로는 노동운동을 극도로 탄압하기 위한 노사관계법·국가보안법에 의한 제도적 정비·국내보안법에 의한 제도정비·노동운동에 군대를 투입하는 파시스트적 폭압정책·매카시즘에 의한 반동공세를 강화하였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1945∼1948년 사이에 미국은 38선을 획정하고 군사적 점령을 통해 남한을 직접 통치했으며, 남한의 단독선거를 주관하고 이승만을 지지했다. 초기의 미국정책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한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이 당사국이 아닌 미국 이익 우선으로 결정되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48년 8월 15일 발족한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하의 친일관료세력 중심의 정부체제였기 때문에 민족국가로서의 정통성에 문제점을 제기하였으며 민족주의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이러한 불안한 남한의 정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군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49년 6월말까지 철군을 완료하도록 안보회의(49.3)에서 결-10, IL-2 YAK-9 등 210여대의 항공기와 2,00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북한의 군사력은 당시 남한에 비하여 월등한 것이었다.(2) 한국전쟁의 진행과정과 휴전이미 1949년 38선을 중심으로 수많은 충돌이 있어 왔다. 바로 이 충돌이 한국전쟁의 작은 불씨가 되었다) 북의 공식자료인 『38전선 무장충돌 조사결과 에 대한 조국전선 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1949년 1월에서 1949년 9월까지 황해도 웅진반도부터 강원도 양양지역에 걸쳐 남한 군대의 38선 이북에 대한 침략은 총 432회였으며, 남측 군대와 경찰 총 4만 9천여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한편, 남한측 자료인 『한국전쟁사』는 호전적인 김일성이 그의 혁명적 무장력인 인민군으로 하여금 장차 남한을 침공하기 위해 그들의 실전 훈련장으로 38선 분쟁을 격화시켰으며, 남침 직전까지 침공 및 불법 사격 횟수가 874회에 달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1950년 봄부터 북한은 부쩍 군사훈련을 강화했고, 38선 부근으로 부대를 이동시키는 등 전쟁준비를 가속화했다.이렇게 임박한 위기가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군은 많은 군인들을 휴가 보냈으며, 전방과 후방의 부대배치를 이동시키고 지휘관들을 전면적으로 재배치시켰다.이러한 와중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6월 25일 새벽 한반도의 서쪽 한 귀퉁이 웅진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단 시작된 전쟁은 그 동안의 38선에서의 팽팽했던 긴장도 만큼이나 재빠르게 38선을 타고 동부로 확대되었다. 한국과 세계의 모든 시선이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뒤이은 3년간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격렬하고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놓이게 되었다.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은 그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로 시기구분이 가능하겠으나 전쟁국면의 양상으로 할 때는 일단 다음과 같은 네시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전쟁의 주체와 전쟁의 성격변화에 따른 시기 구분이 있을 수 있다.제 1국면(1950년 6월 25일∼ 9월 중순): 북한 인민군의 공세기제 2국면(1950년 9월 중순∼한반도에서의 철수, 전선의 안정화와 휴전교섭 방안 등의 3가지 대안을 두고 고민하게 되고 결국 유엔은 휴전교섭방안을 채택하게 된다.휴전협정은 1951년 5월말과 6월초에 소련의 유엔대사 말리크와 미국 캐난 사이에 비밀회담이 행하여 졌고 6월 23일 말리크는 평화의 가치라는 제목의 국제연합 방송을 통하여 교전국가들이 군대를 38선으로부터 철수하고 휴전을 협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소련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유엔군의 리지웨이 총사가 6월 30일 현지교섭을 제안하였고, 이에 북한 인민군 사령관 김일성과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가 수락성명을 냄으로써 휴전회담은 7월 10일 개성에서 열리게되었다.이렇게 시작된 휴전교섭은 의제선택문제를 둘러싸고 처음부터 갈등이 야기되었다. 유엔군 측은 군사적인 문제만을 의제로 채택하려했고, 공산군측은 외국군 철수문제 등 정치적 사안까지 의제에 포함시키려했기 때문이다.7월 26일에서야 제1항 협상 의제의 채택, 제2항 군사분계선 설정문제, 제 3항 정전 감시조항 실시기구의 구성 권한 및 직책문제, 제4항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문제, 제5항 관련각국 정부에 대한 권고사항 문제 등 5개 의사 일정이 합의되고 휴전을 향한 구체적인 협상의 내용이 마련되게 되었다.7월 27일부터 양측은 첫 번째 의제인 군사분계선 문제에 관한 협상을 시작했다. 북한은 38선을 경계로 쌍방 10km를 비무장지대로 설정할 것을 제안했고, 유엔군은 지상에서의 현 전선보다 훨씬 북쪽에 군사분계선을 설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미해군과 공군의 작전범위가 압록강까지 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군사적 충돌은 계속되었다. 이것은 주로 미국의 공중폭격과 전선에서의 충돌 그리고 남한내 빨치산투쟁이었다. 미국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북한지역에 폭격을 가하였다. 또한 한국인 유격대를 북한에 파견하기도 했다..8월 22일에 유엔은 교섭을 중단시키고, 하계공세와 추계공세에 들어가 점령지역을 확대시킨 다음 10월 25일에 판문점으로 회담장소로 옮기고 11월 27일.
    인문/어학| 2001.11.29| 12페이지| 1,000원| 조회(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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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남아시아역사] 태국의 독립수호
    《타이왕국의 獨立守護》Ⅰ. 머리말19세기에 들어와서 西洋帝國主義勢力들의 끊임없는 압력에 의하여 타이王國은 不平等條約을 締結하고 半主權國으로 전락한 것은 이웃 東南亞諸國과 마찬가지 경우였다. 그러나 다른 東南亞 여러 나라는 西洋列强과의 不平等體制가 점점 강화 되 결국 서양열강의 植民地가 되고 말았지만, 타이는 西洋列强과의 不平等體制가 강화되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체제를 점점 폐기하여 독립을 수호하고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서양제국주의국가의 압력을 벗어나고 있다.뿐만 아니라 第1次世界大戰 중에서도 親獨的인 여론으로 獨逸편에 가담할 공산이 컸는 데도 중립을 유지하여 전쟁이 끝날 무렵에 聯合國편을 들어 終戰後 戰勝國의 一員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外交的 승리를 거두었다. 第2次世界大戰 중에는 타이가 일본과 政守同盟을 체결하고 미국에 대해서 선전포고하였는데 불구하고 2次大戰이 끝난 후 타이가 연합국에 의하여 분할점령 당한 일도 없고, 어떤 특별한 불이익을 받지 않고 있다. 이 또한 타이외교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本 논문에서는 19세기 이후 2次大戰이 끝날 때까지 타이왕국이 독립을 수호 할 수 있었던 이유를 不平等조약체결에서부터 2次大戰終戰시까지 타이外交를 중심으로 추적해 보고자 하였다.Ⅱ. 타이의 不平等條約締結타이에 서양 여러 나라들이 진출한 것은 아유타야(Ayuthaya, 1350-1767)왕조 때인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포르투칼을 제외한 유럽국가가 타이에 진출한 것은 17세기였다. 1604년에 네덜란드, 1612년에 영국, 1621년에 덴마크가 진출하였고, 1662년에는 프랑스가 카톨릭 선교사를 타이에 파견하였다. 나라이(Narai, 1656∼88)왕이 죽은 1688년 이후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이 미얀마에 의하여 멸망될 때까지 타이內에 유럽인의 활동이 거의 없었다.라마2세(1809∼24)때부터 서양과의 교섭이 시작되었다.1822년 영국은 타이와 통상조약을 체결코자 하였다. 그러나 라마2세는 통상조약교섭을 거절하였다. 이는 포올콘 사건이래 외국인을 경계하는 경각이를 흔히 버니條約이라고 부른다. 이 조약은 말레이반도에 있어서의 타이와 영국과의 관계를 안정시켰다.1833년 잭슨(Andrew Jackson) 미국 대통령은 로버츠(Edmund Roberts)를 타이에 파견하여 호혜적인 통상조약을 체결케 하였다. 이 조약은 버니조약보다 더 우호적인 것이었다.그러나 결국 버니나 로버츠가 맺은 조약은 영국과 타이, 미국과 타이사이의 무역에 있어서 영국이나 미국측에 큰 이익을 못 주었다. 따라서 영국이나 미국으로서는 호혜적인 내용의 통상조약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으므로 타이에 압력을 가하여 새로운 조건의 조약을 강요하게 되었다.영국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양열강들이 어떻게 하든 타이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려고 할 때, 라마3세가 죽고 라마4세(Mongkut, 1851∼68)가 즉위하게 되었다. 라마4세는 국제정세에 시야가 넓었고 영어에 능통한 동생 프라삔끄라오(Phrapinklao), 추앙 분낙과 함께 국정을 논의하여 서양세력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처하였다.라마4세는 淸과 미얀마가 영국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무력으로서는 영국세력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라마4세는 타이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제로 침략을 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서양세력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런 결과로 1855년 4월 18일 타이와 영국사이에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니 이것이 소위 바우링조약으로 타이가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었다.라마4세가 과연 바우링조약을 체결한 것이 잘한 것이냐의 논란이 있다. 그러나 당시 東南亞 사정을 살펴 볼 때 서양열강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는 예외 없이 식민지화되어 갔으므로 타이가 불평등 조약을 체결치 않고 완강히 저항했다면 타이 역시 식민지화를 면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평등 조약으로 반주권국가로 전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정치적 독립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바우링 조약이 서양열강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앞다투어 타이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길 원하게 되었다.1856년 미국을 시작오스트리아, 헝가리와 조약이 체결되었다.서양열강과 이러한 일련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지만 타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영국과 프랑스였다. 라마4세는 타이가 영·불 양국에 의하여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영국, 프랑스에 신경을 쓰는 외교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Ⅲ. 타이의 獨立維持라마4세는 어쩔 수 없이 불평등 조약을 맺고 치외법권을 인정하였지만 이의 폐기를 위해서는 타이가 근대화되었다는 것을 서양열강들에게 알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였다.俯伏制의 완화, 교통, 통신 시설의 개선, 모든 종교에의 관용, 강제노역의 축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최초의 영어교육의 실시, 육·해군의 현대화, 경제안정을 위한 화폐개혁 및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진흥에 노력하였다.바우링 조약 체결이래 각국과의 불평등 조약 중 가장 특기할 것은 치외법권을 행사하기 위한 영사재판소의 설치였다.영국과 프랑스의 세력 다툼 속에서도 라마4세는 프랑스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親英에 기울이게된다.라마4세의 프랑스에 대한 위기 의식은 1867년 7월 15일 佛泰조약으로 구체화되어 프랑스의 캄보디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고, 타이는 캄보디아에 대한 일체의 종주권주장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때에 라마4세가 죽고 아들 쭈라롱껀(Chulalongkorn)이 즉위하니 이가 타이사상 가장 걸출한 왕이라는 라마5세(1868∼1910)이다. 라마5세는 제위 42년을 통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같은 시대의 일본 明治와 비교되고 있다.라마5세는 근대화 개혁이 서양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다.그리하여 제일 먼저 俯伏制의 폐지를 단행하였다.또한 라마5세는 7종류의 노예를 점진적으로 폐지해 나갔다.교육개혁은 담롱(Somdechkromphraya Damrongrachanuphab)왕자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1883년에는 우편 전신청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주로 방콕에 거주하는 외국상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라마5세는 밀원이 있었다. 이 두 기관이 라마5세가 행정개혁을 추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종래의 타이는 4계급의 州로 나누어져 있고 각 州의 지사는 그 지방에서 절대권을 행사했고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중앙정부와 지방과의 사이에 행정의 통일성이 없었다. 이러한 지방행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라마5세는 담롱을 내무장관에 임명하였다.한편 라마5세는 사법개혁에 착수하였다. 이는 서구제국에 타이가 근대화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여 1883년부터 타이북부의 치엥마이(Chiangmai)·람빵(Lampang)·람뿐(Lamphun)등지의 영국의 아시아인 臣民은 타이재판관에 의하여 판결되는 타이재판소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프랑스의 라오스에 대한 관심은 1886년 佛泰조약을 체결케 하였다. 이 후 라오스에 대한 프랑스의 세력이 점점 증가하는 가운데 1893년 佛泰사이에 충돌 사건이 생겼다. 그 결과 1893년 10월 3일 佛泰조약이 체결되어 메콩강 以南의 라오스 전역을 프랑스에 할양하게 되었다. 1893년의 이 조약은 프랑스의 인도지나반도 통치에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미얀마를 완전 지배하게 된 영국은 인도지나에서의 프랑스 세력권과의 사이에 타이가 완충국으로 존재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1896년 1월 영국과 프랑스는 메콩강을 양국영향권의 경계로 하여 짜오푸라야(Chaophraya)강에 군대를 파견치 않으며, 타이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이 타이의 독립을 완전히 보장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영국, 프랑스 사이에서 타이의 주권을 지켜주는 결과가 되었다.1907년에 이르러 외교고분 스트로벨(Strobel)의 조인으로 라마5세 재위시 프랑스와의 마지막 조약을 통하여 타이는 바탐방·씨엠리압·씨쏘폰을 프랑스에 양도하였다. 대신 프랑스신민인 아시아인에 대해서는 타이가 재판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양보로 타이는 앙코르 문명의 크메르 유적지를 잃게되었고, 프랑스는 재정의 풍부함을 이용하여 앙코를 유적을 재건할 수 있었으며 캄보디아연구에 프랑스 학자 영국이 다루고 있었고 반식민지적인 불평등 체제가 무역상의 이익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타이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경제적 지배권의 대부분을 영국이 행사했고, 또 근대화 개혁도 영국식 전형을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이미 小영국化한 타이를 영국의 입장에서는 구태여 정치적 독립을 말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라마5세는 1909년 7월 15일 그의 재위시의 마지막 조약을 통하여 영국에게 케다·빨릿·까란딴·뜨앙가누를 할양하였다. 대신 영국은 치외법권조항에서 영국의 신민으로 등록된 사람은 유럽인이건 아시아인이건 타이재판소에서 관할하도록 규정하였다.펜시 둑(Pensri Duke)의 주장에 의하면 타이는 독립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6차례 조약에 걸쳐 프랑스와 영국에 518.700㎢의 영토를 빼앗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아유타야왕국 이래 여러 타이 왕들이 영토확장정책결과 획득한 非타이族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일부 영토의 상실은 오히려 남은 타이영토의 타이民族主義가 일어나는 결과가 되었다. 즉, 일부영토의 할양은 타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것이다.Ⅳ. 第1次世界大戰中의 타이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타이의 여론은 親獨的이었다. 라마6세(Vajiravudh, 1910∼25)는 이러한 親獨的인 여론과 이 기회에 영국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자는 압력도 있었으나 1914년 8월 6일 중립을 선포하였다. 라마6세는 실리외교로서 아직 전쟁의 영향이 아시아에 미치지 않았고, 독일과도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까닭에 중립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타이는 전쟁이 종반에 이를 때까지 계속 중립의 입장을 고수하였다.1916년에 이르러 그리스가 중립유지에 실패하고, 타이도 타이자신의 힘으로만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1917년 4월 연합국측에 참전하였다. 전쟁이 연합국측의 승리로 확실해지자 1917년 7월 라마6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하였다. 그러나 타이는 소규모의 병력을 종전 몇 달 전에 파견한 형식적인 참전에되었다.
    인문/어학| 2001.11.29| 5페이지| 1,000원| 조회(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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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남아시아사] 베트남의 독립운동
    《베트남의 독립운동》서론베트남의 민족운동은 프랑스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3지역(안남·통킹·코친 차이나)의 통일이라는 2중 과제를 안고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먼저 민족운동의 배경으로서 프랑스 식민주의의 성격을 고찰한 다음, 근대민족주의의 선구인 문신기의(文紳起義)의 시말(始末)을 개관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민족운동의 지도 세력과 그 패퇴 그리고 공산주의 세력의 대두와 그들이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검토해보고자 한다.본론1)프랑스 식민주의(1)프랑스의 베트남지배15세기 경 동양에의 항로가 발견된 이래, 유럽세력의 동점(東漸)에 있어서 그 선봉이 된 것은 종교인들이었다. 그 중 베트남에서는 최초의 프랑스인 선교사 못뜨(Gedrges de La Motte) 신부(1585)를 비롯하여 제수이뜨(Jesuites)파 승려들이 계속 내월(來越)하여 포교 및 문화의 중개자로서 활약하였다. 이후 계속 된 선교사의 파견으로 베트남에 친불(親佛)카톨릭 교도의 기반이 구축되었다.그러나 프랑스와 베트남과의 관계가 실제상 본격화된 것은 18세기 말경 삐뇨(Pigneau de Behaine)신부 이후의 일이다. 삐뇨신부가 베트남에 올 무렵 베트남은 역사상 최대규모의 농민의 난인 떠이썬(西山)운동으로 인하여 여러 세력들이 대립되어 전국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중 레조(黎朝)이후 남부(南部)에 독립세력을 이루고 있던 우엔씨(院氏)는 떠이썬 군에 쫓기는 몸이 되어, 고립무원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엔씨는 삐뇨의 권유로 프랑스의 세력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양국간에 공수(攻守)동맹조약이 맺어지게 되었다(1787.11)그러나 베트남과 프랑스의 관계는 민망제(明命)시대에 와서 선교사의 살해 등의 종교문제로 악화되어, 프랑스에 공식적인 무력간섭의 구실을 주게 되었다. 그 결과 1862년, 베트남은 프랑스·스페인과 함께 수호조약(제1차 saigon 조약 혹은 壬成條約)을 체결하여 코친 차이나 동부 3성을 할양하게 되었고, 그 후 려지는 이 조약으로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이 됨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러나 그 시행은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여전히 주장하고 베트남 정부도 프랑스에 의한 보호제도의 승인을 주저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그 권리의 관철을 위해 재차 무력수단을 강구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곧 청불 전쟁이다. 그 전쟁의 결과 중국은 큰 타격을 입어 프랑스와 제1차 첸진조약(1885년5월)과 제2차 첸진조약(1885년6월)을 조인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베트남에 관한 청·불 사이에 체결된 최초의 조약으로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권을 정식으로 포기한 것은 물론, 베트남에 있어서 프랑스의 보호권을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었다.(2)식민행정과 통치프랑스는 베트남의 전 영토를 3분하여 코친 차이나(交趾支那: 南圻)·안남(安南: Annam, 中圻)·통킹(東京: 北圻)이라 칭하고, 각기 관리기관을 달리 하였다. 1863년에 식민지가 된 코친 차이나와 캄보디아(1863년 보호국화)는 식민성 관할 하에, 통킹(1883년 보호령)과 안남(1885년 종주권 확보)등은 외무성 밑에 두어 관할하였다. 1887년 11월에 프랑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성립시켰다.(라오스는 1899년에 연방에 편입)1차대전 후에는 인도차이나 행정구역을 6개 단위로 편성하여 통치하였다. 즉, 프랑스의 직할식민지로서의 코친 차이나, 4개의 보호국으로서 안남·통킹·캄보디아·라오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조차(租借)한 광주만 등으로 나누어 총독 관할 하에 두어 다스렸다. 이리하여 우엔조는 명목상으로 베트남 중부지방에 국한된 안남의 조정으로서 프랑스의 보호 밑에 존속하게 되었다.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에 있어서 통치정책의 특징으로는 본국중심주의(本國中心主義)의 동화정책(同化政策)과 분할지배정책(分割支配政策)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첫째, 동화정책은 식민지를 프랑스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식민지는 소위 모국영토의 연장이며 공화국 구성의 일부분이어야 한다는 개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는었다.그리고 또한 노동자의 지나친 저임금은 전후 프랑스산업(Gum: 광공업)에 이상한 호황을 안겨준 반면 식민지 베트남의 노동자들은 절대빈곤층으로 전락시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사회적 계급의식을 조성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전후의 서구적인 민족관념과 사상을 체험하고 유럽·러시아 및 일본 등지에서 귀국한 해외 유학생과 대전중 유럽전선이나 공장에 징발되었다가 귀국한 10여만에 달하는 병사·노동자들의 자유와 민권의식은 이들에게 반(反)식민지의식을 크게 고무시켰던 것이다.2)개명파 문신의 민족운동(1) 문신기의의 전개와 반불투쟁프랑스의 침공에 대한 항거는 그들과 직접 대결해야 했던 관인계급(官人階級)에 의해 시작되었다.함의제(成宜)에 이르러 천진조약의 결과로 청에 대한 원조기대의 기회를 잃어버린 우엔조는 프랑스지배에 완강히 반대하던 똔 텃 투엣 등의 관료일파가 후에에서 기병 하여, 프랑스세력의 구축을 기도하였으나 오히려 프랑스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황궁이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에 함의제는 똔 터 투엣 등과 함께 후에를 탈출, 꽝찌성(廣治省)삼림으로 피신하여 그곳에 게릴라거점을 확보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전국에 근왕(勤王)의 조(詔)를 발하였다. 이 항불격문(抗佛檄文)에 응하여 각지의 문신들이 호응, 농민들을 이끈 의병항쟁이 전개되었다. 이것이 문신들에 의한 근왕운동(勤王運動)의 발단이었다.이에 프랑스 측은 우엔조의 함의제를 폐위시키고 사덕제의 양자인 동카제를 내세워 근왕항불의병의 명분을 꺾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베트남인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어 전국적인 항불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함의제가 프랑스군에 체포되고 아울러 청에 있던 똔 텃 투옛이 망명생활에 들어감에 따라 초기 근왕운동의 중심세력은 와해되었다.그러나 의병전쟁은 안남북부의 판 딘 풍에 이어져 계속되었다.하지만 그의 병사로 항전의 의기를 상실한 저항의 마지막 근거는 쉽사리 함락되었고, 11년 만에 비교적 조직적이고 끈질긴 항쟁으로 프랑스군을 위협하던 중기의군(中圻義갔다.개명파 문신들이 주도하는 민족운동이 실천단계로 옮겨지게 되는 것은 1904년 꽝남(廣南)에서 회(會)를 결성한 후의 일이다. 회에서는 프랑스지배에 대한 무력항쟁이 결의되었지만, 국산 자체무기로는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프랑스군에 대항하기에 불리함으로 무기만은 외원(外援)에 의해 한다고 결론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 반패주(潘佩珠)가 출양외원의 특무를 띠고 회의 부일대표로서 일본에 파견되게 되었다.판 보이 쩌우는 1905년 4월 근대적 군대와 해외원조의 기대를 걸고 중국을 거처 일본에 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정부는 현재 프랑스와 우호조약(日佛條約)을 맺고 있기 때문에 원조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해외원조 유치에 실패한 반패주는 그러나 일본의 현실을 체험하고 중국혁명지사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민족적 자유와 독립에는 무기나 군사력 같은 힘보다 근대적 사회 개혁을 통한 민족역량에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는 일본정부에 대한 무기원조의 희망을 체념하고, 장차 혁명을 이끌어 나갈 인재양성이 선결문제라는 견지에서 베트남청년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동유운동(東遊運動)실현의 발단이었다.1906년 4월에는 홍콩에서 강저후를 회장으로 하여 입헌군주제 밑에 독립을 대변하는 해외 임시정부의 기능으로서 유신회(維新會)를 창설하였다.동유운동은 베트남의 부노(父老)들을 위시한 각 계층의 지사들의 호응을 받아 가세되어 1907년에서 다음해까지는 동유운동의 최전성기로서 유학생수는 200명에 달하였다. 체일 유학생이 늘어감에 따라 이들을 감독·조직하는 한편, 1907년 신베트남공헌회(公憲會)를 설립하였다.실로 베트남인의 항불민족운동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지는 이 동유운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신베트남공회가 결성될 즈음 베트남 국내에서 프랑스군의 독살사건과 군민항조사건이 일어나 프랑스 당국은 전력을 기울여 유신회의 활동을 억압, 취재함은 물론 유학생의 가족들에 대한 체포, 투옥 등의 탄압을 가하는 한편 일불협약을 내세워 일본정부촉구했다."먼저 민족자결의 권리는 우리 월남인민이 필연코 향유하여야 하며, 가까운 장래에 독립을 허락하고 월남인과 프랑스인이 똑같이 평등한 지위를 갖도록 하는 것이 그 최상책이요, 이것이 불구하면 전체적 법률을 폐지하고 입헌제적 법률로 개선할 것이며, 정치범의 석방과 언론·집회 등에 대한 기금(苛禁)을 취소하는 그 중책이며, 만일 이것도 불가능하다면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차라리 월남의 전 국민을 도륙하는 길이 그 하책이다."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테러의 감행과 광복군에 의한 계획적인 항전도 식민통치의 국부적인 위협에 그쳤고 오히려 저항측에 막대한 피해와 아울러 통치상 가일층의 탄압을 초래했을 뿐이다. 그것은 광복회의 지도역량과 조직의 취약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광복회 자체가 대중적 조직을 갖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겠다. 또한 항불전쟁이 실패를 거듭함에 따라 내부의 모순과 분열이 일어나 반백옥과 같은 일부의 동지들이 식민지 정책과 평화적인 타협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회의 조직망도 점차로 와해되어 가고 광복군의 지휘층이 체포, 살해되면서 붕괴되었다.이러한 베트남의 민족운동은 1차대전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1924년 12월 호지명이 코민테른 동방지부의 일원으로 광동에 등장하여 반패주를 비롯한 지사들을 만나 당시 제3차 인터내셔날에 의하여 지도되는 국제공산주의 혁명세력과 합류하자고 설득한다. 이에 반패주는 또 다른 국제적 후원에 기대를 걸고 호지명의 제의(베트남 지구의 건설)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호지명은 반패주의 측근을 이용하여 반패주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만들고, 결국 반패주는 프랑스 관헌에게 체포되고 만다(1925). 이것이 민족주의 진영이 공산주의를 베트남에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4) 개명파 민족운동의 한계성개명파 민족운동이 이렇듯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요인을 살펴보면첫째로, 가족의식이 애국심에 우선하고 있는 베트남의 국민적 타성을 지적할 수 있겠다. 베트남인의 인습적 고집과 그들의 전통사회에 기초
    인문/어학| 2001.11.29| 7페이지| 1,000원| 조회(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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