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삼국시대론에 묻혀 그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가야사를 고고학을 통해 그 진면목을
살펴보는 리포트입니다. 짧은 논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여러 문헌을 참고했습니다.
페이지 수에 비해 정말 많은 노력이 들어간 자료입니다.
목차
Ⅰ.머리말
Ⅱ. 가야의 성립
1. 도질토기
2. 순장
3. Ordos형 동복
4. 무기의 훼손행위
5. 갑주와 마구
6. 묘제
7. 선행분묘의 파괴
8. 가야성립의 동인
Ⅲ. 가야 성장의 동력, 철
Ⅳ. 가야의 문화
Ⅴ. 가야의 국제교류
Ⅳ.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머리말
보통 한국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를 이루고 있다가 신라가 통일한 것으로 설명된다. 신라 이후에 등장한 왕조인 고려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가야의 본기(本紀)가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이러한 역사 인식은 신라에 의한 역사 왜곡을 계승한 것이다. 사실 신라는 가야를 562년에 병합하고, 백제를 660년에, 고구려를 668년에 병합하였는데, 후대에 역사를 편찬하면서 가야 지역은 원래부터 신라 영토였던 것처럼 서술하여 가야의 존재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가야사는 우리나라 고대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가야사는 자국사인 동시에 국제사라 규정해도 좋을 정도이기 때문에 가야사에 대한 면밀한 해석 없이는 우리나라 고대사의 올바른 복원은 물론,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국제관계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한계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가야사는 여전히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있다. 우리나라 측의 문헌만으로는 ‘532년 금관가야의 신라투항, 562년 대가야의 멸망’ 등 겨우 몇 가지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분이며 가야의 성립과 전개특질문화 등 핵심적인 문제에는 한 걸음의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다. 현재 가야사 연구에 있어 가장 많이 참고 되고 있는 문헌이 온갖 오역과 날조로 점철된 일본서기라는 사실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처럼 자체적인 과정의 역사, 자기 발전적인 역사가 아니라 주변국의 관계사로서, 혹은 주변국의 입장에 의해 왜곡된 역사로서 전해왔으며 특히 일제시대를 겪으며 임나일본부의 문제와 연루되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가야사를 대외관계사로만 다루지 않고 자체 발전적인 과정으로 해석하려는 연구 경향이 등장하였다. 그래서 가야사에 있어서는 대외관계사와 자체발전역사의 연구로 그 경향이 나누어지는데 자체발전적 국가로서의 가야에 대한 조명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고고학 자료의 증가에 힘입은 바가 크다.
따라서 보다 활발한 가야사의 연구를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은 고고학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정된 문헌자료에 비해 계속 늘어날 수 있는 고고학 자료는 가야사 복원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근래에 가야유적에 대한 괄목할만한 발굴성과가 축적되어, 이를 기반으로 한 고고학적 연구는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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