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성조사
- 최초 등록일
- 2008.11.29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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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하북성조사
3대 황제 조사
건륭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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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후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典禮)를 문제삼음으로써 중국 전례 논의가 시작되었다. 1704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문화가 너무나도 다른 중국의 전례를 금하고 1715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강희제도 이에 대한 상응조치로 1721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포교는 불법화시켰다.
청나라 고유의 군사 제도인 팔기 제도를 개편하여 제도를 더욱 엄격히 확립시켜, 한 병사가 자신의 부대와 같이 오지 않고 돌아왔으면 가차없이 참형에 처하도록 제정하였다. 황궁의 살림을 아끼기 위해 명나라 때에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의 숫자를 400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비용 역시 명나라의 40분의 1로 줄였다. 치수 공사에도 뜻이 있어, 1677년에 황하 치수 공사에 착수, 1684년에 완성시켜 황하가 범람하지 않도록 하여 농민의 피해를 줄였다. 또한, 소작농을 보호하였으며 감세를 하여 당시 전란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재정 정책 역시 기존의 것에 비해 수정하여, 치세 중기에는 5천만냥이 넘는 은자가 있었으나, 강희제 말년인 1722년에는 은자가 7백만냥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고의 거의 모든 은자가 군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재정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4남 옹친왕 윤진(胤禛)에게 조언을 하고 새로운 정책을 찾으라 명하였으나, 강희제는 그 정책의 실현을 보지 못했다. 박학홍유과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들을 모았고 이 인재들로 하여금 《강희자전》(康熙字典), 《고금도서집성》, 《역상고성》, 《황여전람도》, 《수리정온》, 《전당시》등을 편찬케 하였다.
하지만 문자의 옥을 일으켜, 만주족에게 비판적인 학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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