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의 불교예술과 호족의 한 문화 흡수 -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08.10.08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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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북조의 불교 예술과 호족의 한 문화 흡수에 대한 보고서
목차
Ⅰ. 머리말
Ⅱ. 대동운강석굴에서 보이는 인도풍의 불상들
Ⅲ. 낙양용문석굴에서 보이는 중국풍의 불상
Ⅳ. 두 석굴에서 보이는 호족의 漢文化 흡수
Ⅴ. 맺음말
본문내용
東晋이 망하고 강남에서는 그 자리에 宋齊梁陳의 왕조가 교체되었고, 화북에서는 蠻族의 五胡十六國의 시대를 지나 431년 北魏가 통일한 뒤 북위는 다시 東西魏로 분열하였고, 다음 그 자리에 北齊北周의 왕조가 교체되었다가 589년 隋에게 천하가 통일되니 그 동안을 南北朝時代라고 이른다. 兩晋과 五胡十六國의 뒤를 이어 남북에 군림한 남북조의 문화는 민족은 달랐으나 결국 문화는 한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북조의 문화는 주로 유목민인 북위의 선비족이 정치의 권력을 잡고 한족을 시켜 외래의 서역 문화와 漢문화를 종합하여 봉건문화를 건설하였는데, 그들 북방의 이족은 결국 중국의 한문화를 파괴하고 모방하고 옹호하고 건설하였으니, 당대의 유명한 ‘대동운강석굴’‘낙양용문석굴’‘천룡산석굴’ 같은 것은 다 그들이 이룩한 북조의 위대한 예술이다.
즉 북위는 초기에 평성에 수도를 정하고 불교의 자비심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평화로운 세계로 다스리고자 ‘대동운강석굴’ 같은 것을 이루었으며, 다음 493년 효문제 때에는 胡族의 풍습을 버리고 보다 문화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정책에서 후기의 수도인 하남의 낙양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같이 북위가 한족의 영토에 가까운 하남지방으로 내려가 한족의 禮敎文化를 받아들여 미개한 그들의 사회를 보다 문명한 사회로 발전시켰으니, 이는 결국 강건소박한 북방적 성격에다 세련된 남방적 한족의 귀족문화를 흡수하여 보다 폭이 넓은 융합문화를 이루어 ‘낙양용문석굴’ 같은 것이 나왔다.
이렇게 대동의 운강석굴과 낙양의 용문석굴은 같은 시대의 것이지만 그 모습은 다르다. 이것을 불교의 예술이 중국에 들어와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필자는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하였다. 필자는 북위의 대동에서 낙양으로의 천도와 함께 이루어진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의 축조에서 서로 다른 불상들의 모습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胡族인 鮮卑族이 漢 文化를 흡수해가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東洋美術史 / 金晴江 著 / 乙酉文化社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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云岡石窟, 1~2 / 中國石窟운강석굴문물보관소 / 云岡石窟文物保管所 編 / 北京 :文物出版社 ; 東京 :平凡社,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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