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 사회의 발전
- 최초 등록일
- 2008.06.09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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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학 - 러시아 역사 - 넓게 본 러시아의 19세기
목차
Ⅰ. 알렉산더 1세 (1801-1825)
ⅰ. 알렉산더 1세의 등극
ⅱ. 알렉산더 1세의 개혁
ⅲ. 나폴레옹의 침입
Ⅱ. 니콜라이 1세 (1825-1855)
ⅰ. 즉위식의 총소리
ⅱ. 크리미아 전쟁
ⅲ. 지식인들의 반항
Ⅲ. 알렉산더 2세 (1855-1881)
ⅰ. 개혁
ⅱ. 개혁이후의 변화
ⅲ. 새로운 혁명운동 출현
ⅳ. 대외정책
Ⅳ. 알렉산더 3세 (1881-1894)
ⅰ. 반동정치
ⅱ. 산업발전과 농민의 위기
Ⅴ. 니콜라이 2세 (1894-1917)
ⅰ. 정당으로 자리 잡은 혁명세력
참고문헌
본문내용
-알렉산더 2세 (1855-1881)
개혁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패배가 니콜라이 1세의 군대식 통치체제의 위험성을 명백히 드러내어 체제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았고, 알렉산더도 왕위에 오를 때 어느 정도 개혁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더 2세의 치세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61년에 행해진 농노제도의 폐지였다. 당시 경제발전과 여론의 압력으로 농노제도의 토대는 점차 붕괴되어 농노들이 동요하여 농민반란이 우려되었고, 귀족들은 자신들이 누려온 권리들을 빼앗길까 농노제도의 폐지를 주저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정부는 귀족들에게 개혁에 관한 공개토론을 강요하였고, 얼마 진전되지 않았던 초기 단계에서 해방된 농노에게 농토를 분배해 주어야한다는 원칙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버거운 액수의 상환금을 지불해야 했고, 게다가 국가는 이 상환금을 농촌공동체인 미르가 거두어 한꺼번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농민들의 여러 가지 이유로 미르를 떠나게 되면 남아있는 농민들이 떠난 농민들의 상환금까지 채워서 내야했기 때문에 미르는 공동체 이탈을 통제하였고, 결국 미르에 새로이 예속되는 꼴이 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경제적 권리들을 얻었으나 완전한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또 토지는 노동 가능한 식구 수가를 기준으로 분배되었기 때문에 많은 자녀를 출산하여 토지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었으나 농노해방은 여러 가지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농노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종래 지주가 농노에 대해 행사했던 독점적 재판권이나 치안질서 유지에 대한 권한 등은 소멸되었고, 지방에서 지주들이 누렸던 위신에도 심한 타격이 왔다.
또 지주들에게 위임되었던 지방행정의 전폭적인 재조직이 시급하게 되어 1864년 젬스트보 기구가 수립되었다. 젬스트보 회의의 대의원 선출에는 지주, 농민공동체, 도시민의 3계층이 다 참여하였다. 젬스트보의 주된 관심사는 주민의 복지에 관한 것이었고 일반 행정기능과 공공권력의 행사는 중앙정부로부터 임명받은 행정관들이 맡았고,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지방의 필요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허락되었다. 젬스트보는 주로 도로건설, 의료, 식량, 교육 등의 문제를 해결해 농촌의 경제적, 문화적 개선을 위해 큰 공헌을 하였다. 지방행정상의 변혁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법원의 개혁을 들 수 있는데, 법원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이상을 내걸었다. 사법부는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었고, 재판이 공개되었으며 배심원제도가 수립되었고 변호사 협회가 수립되었다. 또 1874년에는 군대의 개편이 행해져 모든 국민이 병역의무를 다하는 국민징병제가 실시되었고 군복무도 25년에서 6년으로 축소되었고 복무조건도 상당히 개선되었고, 사병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참고 자료
-김경묵(1995), “이야기 러시아사”, 청아출판사.
-강윤희, 이문영, 최아영, 황동하(2006), “러시아학 입문”, 인간사랑.
-이영범(2003), “태마 러시아역사”, 신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