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사업의 효과
- 최초 등록일
- 2008.06.08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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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계천 사업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
사업계획 및 청계천의 역사를 살펴보고
청계천 사업의 파급효과 및 영향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목차
1. 청계천의 정의 및 의미
2. 청계천 복개사업의 배경 및 과정
3. 청계천 복원의 영향 및 파급효과
본문내용
1. 청계천의 정의 및 의미
단어적 의미로는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와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을 뜻한다. 청계천의 길이 10.84km, 유역면적 59.83㎢이다.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무교동 길폭 27.5m, 연장 19.5m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서울광장, 덕수궁, 세종문화회관, 한국잡지박물관, 신문박물관, 일민미술관옛 교량명칭으로 길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과일을 파는 과전(果廛)을 `모전[隅廛]`’이라고 불렀는데, 이 다리가 바로 그 모전 부근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종로구 서린동과 중구 무교동 사이의 네거리에 있던 청계천의 옛 다리이다. 부근에 토산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있어서 ‘모전다리’즉 모전교, 모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원래는 태종 12년(1412) 종묘입구 서쪽의 개천을 석축(石築)으로 방축하고 동쪽을 목작방축(木作防築)할 때 석교로 조성하였다. 당시는 신화방동구교라 불렀으나 영조 연간(年間)에 작성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分界之圖)에는 모전교로 기록되어 전한다.
2. 청계천 복개사업의 배경 및 과정
1) 청계천 복개사업의 배경 및 필요성
청계천이 역사에 나오게 된 것은 조선왕조부터 시작된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아서 한양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큰 고을의 중심부를 흐르는 자연하천에 홍수방지와 생활하수의 원활한 배수 등을 위한 인공하천을 뜻하는 ‘개천’으로 불렀다. 조선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제3대 태종이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청계천에 점점 사람들이 모
참고 자료
http://cheonggye.seoul.go.kr/ 서울특별시 청계천 홈페이지
http://www.naver.com/ 네이버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