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에 관한 자료(신돌석장군)
- 최초 등록일
- 2008.04.17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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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인물에 관한 자료(신돌석장군)
목차
I. 서론
II. 본론
1. 출생 및 시대배경
2. 신돌석의 성장
3. 의병활동의 첫걸음
4. 의병활동의 재기를 꿈꾸며
5. 의병활동의 재기와 전개
6. 의병활동의 침체
7. 태백산 호랑이 쓰러지다
8. 신돌석 장군의 순국에 대한 반응
III. 결론
본문내용
1. 출생 및 시대배경
신돌석은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해군 남면 복평리 정신곡에서 태어났다. 그의 관명은 태호이고 자는 순경이며 돌석은 어릴 때 이름이다. 신돌석은 평산 신씨인 아버지 석주와 분성김씨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고 특히 그의 가문은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후예로서 입신출세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중인신분으로 하락하여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 노릇을 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신돌석 대에 와서는 평민신분으로까지 전락하였다고 하니, 반봉건 의식이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져 당시는 조선정부가 엄청난 충격을 받던 시기였고, 일본 군함들이 측량을 한답시고 우리 바다를 휘젓고 돌아다니던 무렵이었다. 물론 그의 고향인 영해․영덕 앞바다도 예외가 아니였다. 그가 태어난 영해는 이필제 난의 중심지였으며 1870년부터 약 1년 동안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이 난은 삼남민란 이후 최대의 반봉건 농민운동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농민들의 반봉건 의식이 유독히 드높은 고장이었기 때문에 신돌석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또한 그가 태어난 시기는 개항 직후 외세의 침탈이 고조되던 시기였고, 성장하던 시기는 조선을 식민지하하기 위해 일제가 혈안이 되어 가던 시기였으므로 반봉건의식과 함께 반일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일제는 이즈음 세력 만회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민씨정권의 원병 요청으로 조선에 청나라 군대가 파견되었고 이에 일본은 1885년 조선에 변란이일어나 파병을 할 경우 쌍방이 미리 통보하고 사후 즉시 철병한다고 합의를 한 톈진조약을 빌미삼아 일본군도 조선에 입성하게 된다.
이후 일제는 성환전투와 평양전투 등에서 청군을 연파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국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3월 23일 청나라와의 강화조약으로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끝냈다. 이 조약에서 일제는 청나라에게 조선국이 완전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시킴으로써 한국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주장을 일축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