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이 과연 한양천도를 주도했을까 신문고는 정말로 백성을 위한 것이었을까
- 최초 등록일
- 2008.03.28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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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학이 과연 한양천도를 주도했을까 신문고는 정말로 백성을 위한 것이었을까
목차
무학이 과연 한양천도를 주도했을까
․ 무학과 이성계의 만남
․ 한양천도는 무학이 주도하지 않았다
신문고는 정말로 백성을 위한 것이었을까
본문내용
․ 무학과 이성계의 만남
조선왕조 건국과 동시에 새 왕조 조선의 수도를 오늘날의 서울로 정한 이유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설화는 무학이 조선왕조의 도성터를 잡았다는 내용인데, 여기에는 무학과 이성계의 특수한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유학을 근본이념으로 하여 건국된 조선사회에서는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려져 있다.
석왕사가 있는 안변은 이성계 가문의 조상이 살았던 것으로, 그 집안의 세력권에 속했던 지역이다. 따라서 무학은 안변에 왔다가 이성계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석왕사는 이성계의 시주에 의해 세워진 사찰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무학과 태조의 끈끈한 관게는 조선이 건국된 뒤 불교배척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도 무학이 머물던 회암사는 정치적 ․ 사회적 중심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무학과 태조는 세속적인 관계를 떠나 불교를 매개로 한 승려와 구도자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 한양천도는 무학이 주도하지 않았다
무학과 이성계의 이런 특수한 관계로 무학의 한양천도 주도설은 별다른 의문 없이 한국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새 왕조의 도성터를 무학이 잡았다고 하는 것은 한갓 설화에 불과하다. 그는 수도 조성 과정에서도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 이성계 스스로 주도한 한양주도
다름 아니라 천도의 주도자는 바로 태조 자신이었다. 천도는 세가대족인 고려의 지배층은 물론 개국공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조 자신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추진되었다. 태조의 천도 주도권은 천도 과정에서 일관되게 발휘되고 있으며, 한양천도를 결정한 지 불과 두 달 뒤인 10월 25일에 태조 이성계는 역사적인 한양천도를 단행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