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리더십
- 최초 등록일
- 2007.11.28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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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의 리더십에 관한 내용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결론
본문내용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힘을 몰아주어도 힘들 국난극복의 시기에, 세자를 지지하는 세력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치되는 구도를 유산으로 물려준 채 세상을 떠났다. 그 같은 대치구도는 결국 광해군의 집권기반을 취약하게 했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촉발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광해군 개인은 준비된 국왕이었다는 점이다. 광해군은 18세 때부터 세자생활을 하면서 대유학자인 성혼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국정을 폭넓게 익혔다. 7년간의 전쟁은 특히 그에게 있어 백성들의 밑바닥 생활을 절실히 체험하는 기회를 주었다. 분조를 이끌고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다니면서 전쟁지원업무를 펴고 백성들을 위무 격려할 때 얻은 경험은 역대의 어느 세자나 국왕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살아 있는 현장교육이었다.
즉위 직후 광해군은 순조롭게 정국을 끌어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내고 싶은 영의정 유영경이었지만 선왕이 중용한 대신이라면서 한동안 그대로 놔두었다가 사직하게 배려했고, 후임으로 남인이며 백성들로부터 칭송 받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다른 요직도 정파를 가리지 않고 북인, 남인, 서인을 망라했다.
일종의 연립정권이었는데,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며 자리를 잡아가기 위해 서라면 연립정권은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문제의 시작은 왕권과 신권의 충돌이었다.
광해군은 대북파의 요구를 거부했으나 계속되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시켰다.
그는 그 정도의 조처만으로 파문을 수습할 생각이었지만 영창대군은 끝내 살해당하고, 인목대비는 폐하여진다. 이는 단호한 태도를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 광해군의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결과였다.
참고 자료
‘조선 중기 정치와 정책’. 아카넷.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 정치사 연구반.
조선 왕조에서 배우는 「위기 관리의 리더십」. 열린책들. 오인환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 역사비평사. 한명기
조선왕조에서 배우는 「군주리더십」. 거송미디어. 김만중
성공한 왕, 실패한 왕. 동방미디어. 신봉승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김기흥 외
「한국사 시민강좌」31집(실패한 정치가들). 일조각. 이기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