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계획도시 수원 화성
- 최초 등록일
- 2007.04.28
- 최종 저작일
- 2007.01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조선최초의 계획도시 수원 화성에 관한글 입니다.
목차
1. 華城 建設의 歷史的 背景
2. 華城의 立地 條件 및 形成過程
3. 華城의 構造
4. 華城의 繁榮策과 華城經營의 時期別 特徵
5. 華城城役의 경과와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1776년 갖은 파란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선대 이래의 蕩平政治를 계승하되 개혁적 명분을 전면에 내세워 정국을 세롭게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스스로의 탕평을 ‘義理의 蕩平’이라고 하면서 ‘混淪의 蕩平’과 명백히 구분하였다. ‘義理’란 천하의 公적인 것으로, 조정에서는 각기 그 나름의 붕당과 의리론을 가진 군주와 사대부 출신 신료들이 공존하면서 탕평정국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 정조의 의리탕평론이었다.
정조의 탕평정치는 ‘탕평’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왕 주도하의 정국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유교적인 왕도정치와 혁신정치를 구현하는데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왕권강화를 위한 목표를 친왕세력의 육성과 격화된 후기사회의 봉건적 모순을 척결하기 위한 민본적인 개혁정치를 펴기 위해서도, 왕권의 권위와 정치적 안정이 무엇보다 절실하였다. 정조는 먼저 壬午禍變 때 희생당한 생부 思悼世子를 伸寃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국왕의 신변 위협은 물론 왕권을 제약하고 개혁왕정을 펴나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保守勳戚과 老論辟派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를 위해 이 시기 정조는 右文정치를 표방하면서 奎章閣과 抄啓文臣 제도를 마련하여 청론사류를 결집시켰으며, 서얼 출신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는 등 中庶層의 신흥 사회세력까지도 수용하여 측근에 친위 관료학자군을 양성하였다. 또한 壯勇營의 설치와 운영에 의해 친위군사력과 경제기반까지 갖춤으로써 탕평의 권력기반을 마련해 가고 있었다. 즉위 초 정조는 사도세자의 존호를 莊獻世子로 올리고, 묘소의 園號를 永祐園, 궁호를 景慕宮으로 높였다. 그리고 정조는 13년(1789)에는 전격적으로 숙원의 永祐園 遷園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 청론사류의 분열로 시파 벽파의 대립이 생긴 위에, 정조 측근에서 다시 ‘權幸’이 등장하고, ‘貴近之弊’가 발생하였으며, 더욱이 정조가 규장각에서 근신으로 키웠던 친위 관료학자들이 북학과 서학의 수용을 선도하는 세력이 되면서 학문적 사상적으로 분열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는 정조대 사상과 문화의 역동성과 다양성의 산물이었으며 시대의 대세였지만 정조의 정국운영에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