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처용가의 배경설화는 삼국유사 기이 제이편에 헌강황대 처용랑 망해사 부분에 나온다.
삼국시대때 불려진 처용가와 고려시대때 불려지 삼국유사는 내용부분에서 조금 다른데 이 자료에서는 삼국시대때 불려진 처용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배경설화를 살펴봄으로써 처용의 존재를 무엇을 봐야할지 생각해 보았다.
4학년 `고대시가론` 과목에서 A+ 받은 과제.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處容郞 望海寺’에 나타난 歷史的 事實
(2) ‘處容’의 正體
1. 巫俗的 觀點
2. 역사적 실존인물
(3) ‘龍’의 意味
1. 民俗象徵
2. 神話的 象徵
(4) 疫神의 존재
Ⅲ. 결론
본문내용
헌강왕대는 신라 하대에 해당되는 시대라 중앙 진골귀족 사이에 정권 싸움 내지 왕위쟁탈 싸움이 수시로 일어났기 때문에 당대의 시대사조는 불안과 위기의식으로 말미암아 세기말적 풍조로 깊이 물들어 있었다. 崔柄憲 교수가 헌강왕대를 중심한 신라하대의 사회실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함은 정곡을 찌른 것이라 하겠다.
헌강왕대는 중앙 귀족들의 도에 넘치는 향락생활에 대하여 그 이면에서는 몰락하고 있던 일반민 중들의 불만이 팽배하여 있어서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불안은 귀족들 에게도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왕실이나 귀족들의 醉生夢死하는 세기말적인 향락 생활도 실은 그들의 불안을 잊고 태평을 가장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 탐구당, 1978, p.498
헌강왕은 이러한 정치적 · 사회적 불안과 위기의식의 발생이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라 생각하고, 유고정치의 구현을 위해 國學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에게 經義를 강론케 하기도 하는가 하면, 佛力에 의한 왕권 회복과 호국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호국사찰인 皇龍寺에 행차하여 百高座를 베풀고 講經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민심 수람을 위한 지방 순행을 했으며, 여기에서 국가 경제의 파탄 위기를 극복할 의도로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한 각종 행사(주로 民俗祭儀)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왕의 開雲浦 행차도 곧 그와 같은 목적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이는 「新增東國與地勝覽」蔚山郡 山川條 開雲浦에 대한 설명에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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