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사]한국고대의 정치제도사
- 최초 등록일
- 2006.06.24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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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삼국시대의 정치제도
1. 삼국이전의 정치제도
2. 삼국의 정치제도
Ⅲ. 남북국시대의 정치제도
1. 통일신라
2. 발해
본문내용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전 방면에 걸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는 그동안 삼국간의 항쟁과 당과의 전쟁으로 인해 소모되던 여력을 발전에 전부 쏟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지배하면서 국력을 신장시키고 정치적 발전을 도모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중대에는 중앙의 정치기구를 확대하고 지방행정조직을 재편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통일 후 중앙관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후에 우이방부(667), 예작부(686) 등의 관부가 설치되고, 기존의 각 관부에 많은 관원이 증치되었다. 이에 신라의 정치기구는 이부에 해당하는 위화부, 호부인 창부와 예부, 병부, 그리고 형부격인 좌이방부, 우이방부, 공부격인 공장부, 예작부 등이 설치되어 6전조직의 체계를 갖추었다. 또한 집사부도 하대에 가면 집사성으로 승격되고 그 장관도 중시에서 시중으로 격상되어 (829, 흥덕왕 4년) 이것은 집사성이 점차 타 관부들을 총관하게끔 기능이 확대된 데에서 생긴 변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당제의 모방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독자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의 최고관부인 3성을 본떠서 집사성을 마련하고 그 장관을 시중이라 하였으나 시중의 지위가 낮았으며 전통적인 상대등의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기에 집사성의 기능이 약하였다. 또한 중앙 관직도 당의 6전조직을 모범으로 하였지만 그대로 실시되지는 못하여 당제와 큰 차이가 있었다. 이 같은 신라 정치제도의 특성은 귀족 세력의 대표인 상대등과 병부위주의 전통적인 권력구조의 지속과 당제를 그대로 채용할 수 없었던 신라 사회의 미숙성이 그 원인이었다. 시중은 1인이었지만 기타 관부의 장관은 2명이었으며 이것은 그들이 정치적 존재로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실무는 차관인 시랑, 경 이하 관에게 맡겨져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