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난파진가
- 최초 등록일
- 2005.11.23
- 최종 저작일
- 2005.06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일본 최초의 시가는 백제의 학자 왕인 박사가 쓴 시가 ‘난파진가(難波津歌)’이다. 왕인 박사가 405년 일본에서 처음 지은 ‘난파진가’를 우리 말로 풀면 5.7.5.7.7의 음수율을 갖고 있다. 5.7.5.7.7 조는 일본 고대 시가의 전형적 형식이며 우리 근대시의 율조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일본시의 7.5,5.7조는 왕인의 와카에서부터 내려오게 되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일본 최초의 시가는 백제의 학자 왕인 박사가 쓴 시가 ‘난파진가(難波津歌)’이다. 왕인 박사가 405년 일본에서 처음 지은 ‘난파진가’를 우리 말로 풀면 5.7.5.7.7의 음수율을 갖고 있다. 5.7.5.7.7 조는 일본 고대 시가의 전형적 형식이며 우리 근대시의 율조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일본시의 7.5,5.7조는 왕인의 와카에서부터 내려오게 되었다.
최초의 와카 ‘난파진가’는 한자어로 쓰여졌다. 우리의 향가가 한자어를 음,훈등 표기식의 향찰로 기록했던 것처럼 한자어를 차용한 일본의 표기법 ‘만요우가나’ 음,훈의 표기법을 따르고 있다. 왕인 박사는 일본에 한자를 전해줬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만요우가나’를 창시했다. 우리의 고시가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75조의 율격은 백제가요 ‘정읍사’가 대표적인 것으로 7.5조를 이루고 있다.
왕인이 처음으로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가서 왕자에게 글을 가르치고, 405년에 난파진가를 지은 것이다. 요즈음은 왕인이 일본문화의 원류하고 생각하는 견해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왕인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다. 왕인은 일본에게 한자문화를 전해 주었다. 왕인이 전한 ‘논어’와 ‘천자문’은 한자, 한문을 공부하는데 가장 기초적이고 합리적인 교본이다. 그러나 일본학자의 일부는 이를 부정한다. 논어는 한대에 고론, 제론, 노론의 삼론이 있었다고 한서의 ‘예지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고 있지 않아서 논의가 분분하다. 천자문의 작자 주흥사는 470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전해져 그 이전에 왕인이 일본에 한자를 전해주는 것을 불가능 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제는 일찍부터 한자문화를 능숙히 소화하여 독자적인 천자문을 만들어 갖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비약이 아니다. 즉, 논어와 천자문으로서 유교와 교학 일체를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도래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함부로 만들어낸 설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홍상규의 ‘王仁’ 참고.)
‘난파진가’는 ‘고금와카집’을 필사한 ‘다테본’등에 왕인 박사의 작품으로 기록되어있다.
참고 자료
1. 한국의 명시 감상 문학박사 홍윤기 편저
2. 왕인 홍상규 지음
3. 마이다스 동아일보 매거진 12월호
(1999.12 - 백제 무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은 형제였다.- 문학박사 홍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