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 최초 등록일
- 2005.10.20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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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선지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일반적으로 많이 들어온 이름인데 자세히 그 인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게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이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동북공정이라는 말이 우리의 역사를 위협하는 이 시점에서 중국에게 고구려 사람 고선지가 중국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 고선지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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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 고선지는 고구려인이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대륙의 하서에서 안서로 이주했다. 그리고 어린 나이지만 20세에 당의 유격장군이 되었다. 내가 안서부도호-사진도지병마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장군으로서 최고의 지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당에서 도호를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에게 임명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내 비록 고구려인으로서 이민족 출신이었지만 당에서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내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당에 의해서 나라를 잃은 이민족으로서 나를 곱게 보는 이는 없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나라를 잃은 자의 설움으로 당연한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처지를 비관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택한 길이 무관의 길이었다. 문관은 아무래도 한족의 견제와 시셈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에 그 보다는 좀더 쉽게 공을 세울 수 있는 무관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이민족 출신이었지만 군인으로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나는 좀 더 빠르게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당에서 주목받았던 사건은 천보 6년(747년) 현종의 명을 받아 토번 정벌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이다. 이미 당의 안서도호가 토번 정벌에 세 번이나 실패하고 난 뒤의 일이라 나에겐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리고 당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토번 정벌군 총사령관직의 직함이 행여절도사로 불리어진 것은 행여절도사는 어느 지역에서든 절도사직을 수행할 수 있는 특별관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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