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 일본문학과 문화
- 최초 등록일
- 2005.04.26
- 최종 저작일
- 2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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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임진왜란
2. 조선통신사
본문내용
1.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31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군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싸움,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이라 하며, 정유년에 또 다시 쳐들어온 싸움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까지 조선은 외교 정책을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큰 나라인 중국을 섬기고 이웃의 작은 나라인 여진, 일본과는 화친한다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여진, 일본에 대해서는 혹은 무력행사를 하기도 하고, 혹은 교역을 통해 관계를 유지해 왔다. 조선은 여진과 일본을 야만인이라 하며 멸시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왜(倭)’라고 부르며 시종일관 내려다보는 자세였다.
그런데 16세기 들어 국제정세는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명나라가 차츰 세력을 잃고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나중의 청나라)이 강성해지기 시작했으며, 일본은 오랜 내전 끝에 통일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1년 전, 통신사 황윤길 일행을 통해 ‘명을 정벌하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 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바 있는 데도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일본의 속셈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동안, 서인으로 갈려 당쟁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국방에 전혀 속셈을 쓰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유럽에서 신무기 조총을 들여와 대량생산하는 등 전쟁준비를 마쳤다, 이이가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해도 도리어 지배 계급들은 배척하는 실정에 있었다. 그처럼 조선이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본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와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도요토미는 국내 통일에 이용한 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돌려 자체의 불안을 없애려 했다. 특히 당시 유럽에 의해 발전한 신흥 상업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대륙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대륙 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