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고미숙
- 최초 등록일
- 2023.02.16
- 최종 저작일
- 20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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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연암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이런 식의 글쓰기를 그만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는 말한다. 타인을 비판하는 것으로 명예를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 못된다고. 그 말이 뇌리에 박히면서 비평이 딱 재미없어졌다. 게다가 아무리 독설을 신랄하게 해도 상대방이 내 의견을 경청하거나 바뀔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왜?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증명해 보이는 게 목적이니까. <동의보감>을 배우고 보니 그런 식의 글쓰기는 몸에도 해롭고 정신에는 더 해롭다. 이런 질문에 봉착하게 된 건 전적으로 박사실업자가 되어 수유리에서 지식인 공동체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교수가 되지 못했다는 건 전공을 중심으로 글쓰기를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럼 뭘 쓰지? 아니 그 이전에 뭘 공부하지? 당연히 인생과 세상에 대한 공부를 하면 된다. 쉽게 말해 그냥 끌리는 대로 하면 된다. 그때부터 내 공부의 영역은 무한 확장되었다. 서양철학, 포스트모더니즘, 뇌과학, 동양의학, 불교, 자연과학 등등.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20세기는 문학주의의 시대였고 글을 쓴다는 건 문학 혹은 문학 주변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뿐이다. 실로 대단한, 동시에 지독한 판타지다. 교수가 되었다면 평생을 이 망상의 그물망에서 허우적댔을 것이다. 거기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나의 40대는 충만하다.
병을 치유하기 위해 길을 찾아 헤매다가 동아시아 최고의 의학고전을 만난 것이다. 거기에서 또 하나의 벽이 무너졌다. 의학, 즉 몸과 질병도 앎의 영역이었구나/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오롯이 전문가에게 맡겨 놓고 전혀 돌아보지 않았을까? 삶의 가장 구체적인 토대는 몸인데, 왜 우리는 몸을 생략한 채 온갖 이미지로 삶을 기획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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