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과 척준경, 후대의 평가에 대해
- 최초 등록일
- 2022.08.15
- 최종 저작일
- 2021.12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5,000원
목차
1. 서론
2. 본론
1) 윤관의 일생(『고려사』를 중심으로)
2) 윤관의 업적과 배경
3) 윤관에 대한 평가와 척준경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윤관(尹瓘)은 자가 동헌(同玄)이며 파평현(坡平縣) 사람이다. 고조(高祖)인 윤신달(尹莘達)은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으며 공신집안으로 아버지 역시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윤관은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습유(拾遣), 보궐(補闕)을 역임하였으며, 숙종(肅宗) 때 동궁시강학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한림학사승지(東宮侍講學士 御史大夫 吏部尙書 翰林學士承旨)로 여러 차례 승진하였다.
A-1의 사료에서 숙종 7년(1053)에 여진이 정주관(定州關) 당시 고려의 변경에서 사신이나 외국인들이 임시로 지낼 수 있는 관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이를 춘주관(春州官)이라 한다. 따라서 이 정주관 역시 동북방면 변경에서 당시 북쪽에 위치한 여진인 들과 소통에 활용되었던 관청으로 생각된다.
서긍, 『고려도경 : 송나라 사신 고려를 그리다』, 서해문짐, 2005, p.65
밖에 주둔하는 등의 대규모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고려 조정의 대응으로 여진족의 추장을 잡아 심문하였다. 이를 통해 여진의 고려 공격 계획을 알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여진의 지속된 저자세에 방심하여 이를 금방 평정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때 여진은 추장들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적 성격에서 벋어나 점점 통합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모르던 고려 조정은 임간(林幹)에게 명령하여 가서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전패(戰敗)하는 상황이 생긴다. 이에 여진은 승세를 타고 고려 동북방면을 유린하는 상황까지 직면한다. 이에 윤관을 임간 대신으로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에 임명하고 부월(鈇鉞) 임금이 전장에 나가는 장수에게 하사하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로 자신을 대신하여 적을 심판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따.
을 주어 보냈으나 패배한다. 이에 고려는 자세를 낮추어 여진과 맹약을 맺게 되고 왕까지 공식적으로 노(怒)하는 의사를 밝히기도 한다. 왕이 분노하여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고하기를, “원컨대 은밀하게 도움을 주어 적경(賊境)을 소탕하게 해주시면 그 땅에 불우(佛宇)를 지어 바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국정도서편찬위원회, 『중학교 국사』, ㈜두산, 2009년
서승, 『송나라 사신, 고려를 그리다 고려도경』, 서해문집, 2005.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
정인기, 『고려사열전』,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1.
한국중세사학회, 『21세기에 다시 보는 고려시대의 역사』, 혜안, 2018.
이인철,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의 위치 연구」, 『선도문화』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