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우리 문화유적 답사기 - 사육신공원
- 최초 등록일
- 2003.12.22
- 최종 저작일
- 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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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직접 방문 후 작성한 답사기이기 때문에, 생생한 현장이야기를 많이 담았습니다. 그리고 인터넷과 본 해피캠퍼스의 기존 자료를 여러 개 다운받아 참고하였기 때문에 질적 완성도가 충분할 것입니다.
또한 현장 답사기에 그치지 않고, 사육신 거사에 대한 역사적 상반되는 평가들에 대해 짚어본 후 제 나름으로 분석해보았습니다.
시험없이 과제 제출만으로 A+ 받은 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답사지 선정동기
Ⅱ. 답사지 사전조사
- 도서관, 인터넷
Ⅲ. 현장답사
- 사전예상과의 차이점, 소득, 문제점, 제안점
Ⅳ. 사육신에 대한 나의 견해
- 충신인가 역적인가
1. 사육신의 거사
2. 비유교적·반시대적이란 평가
3. 정당한 거사라는 평가
4. 나의 생각
본문내용
3. 정당한 거사라는 평가
앞의 시각에 비해, 절의를 지킨 충신이라는 평가는 휠씬 더 지배적이다. 숙종이 사육신의 관직을 복원하고 서원까지 내린 것은 세조의 영명함과 성덕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이는 당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조선은 침체된 사회분위기와 국정을 일대 쇄신하기 위해 여러 시책들을 단행한다. 그 가운데 정신적, 사상적으로 절의와 명분이 강조됐는데 사육신이 그 대표적 인물로 부각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사육신이 조선 민중들 마음속에 충신으로 평가돼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조선의 선비들에게 유교적 질서는 그들의 실존을 가늠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었다. 그런 점에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은 왕권을 탐한 명백한 쿠데타였고, 선비들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사육신은 장래가 보장된 관료였다. 그들은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조선의 기본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면 나라도 무너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그러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왕이 됐다. 더욱이 쿠데타 추종세력의 전횡은 조정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는데만 급급해 나중에 훈구파로 사색당파의 뿌리가 됐다”고 말했다. 즉 사육신의 거사는 당시 선비로서 당연한 결단이었다는 평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