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5세기 농업기술의 발달과 신흥사족
- 최초 등록일
- 2020.12.18
- 최종 저작일
- 20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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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 전기의 농업기술의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세종기의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중심으로 추구되어, 그 기술이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한지농법(旱地農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당시에 저명한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가 <직설(直說)> 편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요(輯要)>의 활용이 반드시 농업기술의 발전 방향을 바로 의미하는 것인지는 의미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집요>의 편찬 당시, 중국농업은 남송(南宋) 지역의 강남(江南) 수도작(水稻作) 기술상의 일대의 발전으로 이제까지 화북쪽이 누리던 선진성이나 우위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원(元) 세조(世祖) 칙찬(勅撰)의 <집요>는 그것이 아직 영역권 밖임으로 논외로 하고, 600년 전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을 중심으로 화북의 한지농법을 주 대상으로 정리하였다. 이후 남송(南宋)이 멸망한 뒤에 이를 보안하기 위해 원나라는 <왕정농서(王禎農書)>와 <농상의식촬요(農桑衣食撮要)> 등의 편찬으로 그러한 <집요>의 한계를 보완하였다. 이러한 농서사(農書史)의 <요술(要術)>의 이러한 특별한 사정을 염두한다면, 좀 더 신중을 가해야 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결국 중국과의 기술상의 낙차가 보다 큰 폭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조선전기의 농업기술은 우선 시기적인 면에서도 중국 남·북 농업 양자에 대한 비교가 필요하다. 따라서 남·북 농업의 차이를 결정지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인 ‘시비법(施肥法)’을 중심으로 조선전기의 농업 기술상의 단계를 확인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생산의 주체인 농민(農民)의 역할도 적지 않지만, 고도의 지식을 요하는 것 일수록 지식인의 역할도 주목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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