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머리말
Ⅱ.송국리유형 문화와 기원
Ⅲ. 송국리유형 주거지
Ⅳ. 송국리유형 출토유물
① 토기
② 석기
③ 청동기
Ⅴ. 송국리유형 묘제
① 석관묘
② 석개토광묘
③ 옹관묘
Ⅵ. 맺음말
Ⅶ.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머리말
부여 송국리유형 문화는 취락구조와 조직, 출토된 유물의 분석을 통해 무문토기사회의 큰 획기를 이루었다. 송국리유형 문화는 송국리식 토기 및 송국리식 집자리를 비롯한 일련의 독특한 문화요소로서 규정된다. 이 문화유형은 무문토기시기 전기 말 혹은 중기에 성립되어 한반도 남부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 전후로 복합사회의 징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발제에서는 송국리형 문화의 기원과 일련의 유물조합, 독특한 주거지와 묘제 양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Ⅱ.송국리유형 문화와 기원
송국리유형은 1970년대 초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발견된, 타원형의 수혈을 배치한 독특한 구조와 원형의 주거지와 이들 유구에서 발견되는 외반구연호(外反口緣壺), 적색마연토기, 일단병식석검, 삼각형석도 등을 표지로 하는 문화이다. 이는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서부에 집중되고 제주와 일본까지 영향을 미친다. 다만 안성천 이북의 경기지역과 강원 및 영남 동부에서는 드문데, 이런 곳에서는 전 시기의 문화상이 그대로 혹은 약간 변형된 채로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는 문화유형으로서, 영서지역에서는 천전리유형과 영남 동부에서는 검단리유형이 설정되고 있다.
송국리유형은 그저 단순히 유구와 유물의 획기적인 변화라기보다, 이전의 무문토기 조·전기의 시기의 문화를 대체하며 사회를 더 복합적이고 위계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마을에서는 주거단위의 분화, 마을 규모와 분묘의 급증, 목책이나 환호 시설의 보급 등의 일정 구역의 방어체계의 성립, 마을 기능의 분화, 위계질서의 반영을 비롯한 여러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벼농사의 보급으로 발생한 잉여생산물의 증가로 정치권력이 발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동유물이 실용기가 아닌 매장자의 정치권력을 대변하는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양상은 이를 증명한다.
참고 자료
이수홍, 『청동기시대 고고학 3, 취락』, 서경문화사, 2004.
김권중, 『청동기시대 고고학 5, 도구론』, 서경문화사, 2004.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강의』, 사회평론, 2007.
김승옥, 「금강유역 송국리형 묘제의 연구 석관묘 · 석개토광묘 · 옹관묘를 중심으로」,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보』 제 45호, 2001.
우정연, 「중서부지역 송국리복합체 연구 - 주거지를 중심으로」,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보』 제 47호, 2002.
이종철, 「호남지방 송국리형 주거문화」, 한국상고사학회 『한국상보사학보』 제 36권, 2002.
이진민, 「중부 지역 역삼동 유형과 송국리 유형의 관계에 대한 일고찰 -역삼동 유형의 하한에 주목하여」,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보』 제 54권, 2004.
유병록, 「경상 남해안 송국리문화의 특징과 교류」, 『청동기학보』 제 6권, 2010.
김민구, 2007, 「부여 송국리유적 장방형주거지 출토 탄화 목재의 연구 - 건축재 선택양식의 이해를 위한 시고」, 한국상고사학회 『한국상보사학보』 제 55호, 2007.
김범철, 「중서부지역 청동기시대 수도 생산의 정치경제 - 금강 중·하류역 송국리형 취락체계의 위계성과 도작집약화」,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보』 제 58호, 2006.
황재훈, 「호서-호남지역 송국리식토기의 시·공간성」, 한국고고학회 『한국고고학보』 제 77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