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A+독후감]
- 최초 등록일
- 2020.11.26
- 최종 저작일
- 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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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자하 도인’이라고 불리며 문장과 경학에 뛰어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위인으로 기억되어진 정약용 선생님은 당시 조선시대 신분제를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아 전라남도 강진에서 18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유배생활을 하셔야만 했다.
“궁벽하게 사노라니 사람 보기 드물고 항상 의관도 걸치지 않고 있네.
낡은 집에 향랑각시 떨어져 기어가고, 황폐한 들판엔 팥꽃이 남아 있네.
병 많으니 다라서 잠마저 적어지고, 글 짓는 일로써 수심을 달래 보네.
비 오래 온다 해서 어찌 괴로워만 할 것인가. 맑아도 또 혼자서 탄식할 것을.”
선생님의 시 중의 하나인 구우에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황폐한 환경에서 친구하나 없이 힘든 귀양살이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란 본디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남을 생각하고 위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정약용 선생님은 오히려 오랜 비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 있어도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고 괴로워하며 오로지 백성들을 생각할 뿐이셨다.
정약용 선생님이 백성들을 끔찍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시대의 상황이 이러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터전은 폐허가 되고 농사를 지을 장정들은 전쟁에 나가 죽거나 부상을 당해 농업 생산량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세금을 내거나 부역을 할 수없을 정도로 나라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고, 이에 임금은 관리들에게 세금 독촉을 더욱 강하게 하고 관리들은 폭력과 비리를 통해서라도 세금을 받아내려 하였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다른 사람에게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땅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며 살아왔는데 소작농인 경우 농작물의 70%를 지불해야만 했기에 백성들 입장에선 국가에 낼 세금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국가에서는 세금을 낼 백성이 줄어드니 재정이 빈곤해지고 국가사업을 운영할 수 없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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