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와 한국영화의 거장 나운규
- 최초 등록일
- 2020.09.06
- 최종 저작일
- 20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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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영화사와 한국영화의 거장 나운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해방 이전 한국영화사
2. 해방 이후 한국영화사
3. 한국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 나운규
4. 자료 출처
본문내용
한반도에 영화가 유입된 시기는 대략 1900년 전후였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는 대중들 사이에서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조선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와 최초의 기록영화 <경성 전시의 경> 및 <경성 교외 전경>이 상연, 상영되었다. 이 둘은 조선인이 제작, 각본, 감독, 출연한 작품으로서, 1966년 한국영화인협회에 의해 이들 작품이 처음으로 상영된 1919년 10월 27일이 ‘영화의 날’로 제정되었다.
1920년대 들어 조선에서 극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최초의 극영화에 대한 주장은 여러 가지로 갈리지만, 대체로 1923년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세>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극영화인 <국경>과 최초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극영화 <춘향전> 역시 1920년대 초반에 등장하였다. 순수 조선인 제작영화 <장화홍련전>도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1924년, 순수 영화 제작사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창립 작품은 <해의 비곡>이며, 2회 작품 <운영전>이다. 그 해 〈암광〉, 〈촌의 영웅〉도 발표했지만, 조선 영화 시장이 예상보다 협소했고 일본 배급 회사와 관계도 틀어져 수출 판로가 막히게 되자 4편의 영화만을 제작하고 해산했다.
1920년대는 여러 제작사들이 활개를 치던 시기였다. 윤백남프로덕션은 제1회 작품으로 <심청전>을 발표했다. 이경손은 고려키네마를 설립하고, 윤백남의 동의를 얻어 <개척자>를 완성하였다. 이구영과 이필우는 고려영화제작소를 설립하고 <쌍옥루>를 제작하였다. 반도키네마는 《조선일보》의 연재만화 <멍텅구리>를 영화화하였다. 조일제가 세운 계림영화협회에는 윤백남프로덕션 및 고려키네마의 일원들이 대거 영입되었다. 계림영화협회는 제1회 작품으로 <장한몽>을 제작하였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에서는 약 20여 개의 영화사가 생겨났고, 약 40~50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실질적으로 무성영화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영화사1’, ‘한국영화사2’ - 한양대학교 함충범 교수
《한국영화 100년사》 - 안태근 지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운규
네이버 인물한국사, 나운규
독립운동가, 나운규 – 한상언 교수
인물 한국사, 나운규 - 김정미, 장선환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영화의 힘 느껴, 배우가 되다 - 윤봉춘(3) - 씨네21
조선키네마사를 탈퇴하고 ‘나운규프로덕션’ 간판을 걸다 - 윤봉춘 4, 씨네21
네이버 지식백과, 나운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오몽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