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최남선의 아비투스적 해석
1. 가계와 성장
2. 신문화 운동
Ⅲ. 결 론
본문내용
최남선(1890~1957)의 생애는 전형적인 식민지 지식인의 삶을 보여 준다. 그는 한국이 일본의 영향권 내에 들어서던 시기에 태어나 성장, 일본을 통해 근대 문명을 흡수하여 자신의 학문을 이루어 일제시기에 명망가로 부상했고, 결국 친일로 돌아섰다. 노년기에 접어들어서야 해방을 맞아 처음으로 ‘자주 독립 국가’를 체험한 그의 생애야말로 한국 근대사의 산 증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최남선이 중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자주 거론 되지만, 그의 가계와 신분적 특성이 생애와 사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았다. 그는 개화기라는 변혁기에 가문을 중흥시키고자 했던 아버지의 기대와 후원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기술관 중인이었던 아버지 최헌규는 최남선을 비롯한 자식들을 당대의 명망가로 부상시키는데, 그의 집안이 중인 계층에서 근대 엘리트(상층계급)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최남선은 부르디외가 말한 자본의 개념 즉,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의 형태가 효과적으로 동원된 최고의 장(場)속에 있던 인물이었다.
본고는 최남선의 생애를 통해 그가 어떠한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을 갖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최남선의 아비투스
1. 가계와 성장
최남선은 1890년 4월 26일 부친 최헌규와 모친 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육(公六), 호는 육당, 대몽, 육당학인, 한샘, 남악주인, 곡교인, 축한생등 이다. 그의 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六堂이다. 그 자신이 六堂의 뜻을 설명한 바 있는데, 북두는 칠성(七星)이고 남두는 육성(六星)인데, 본명이 남선(南善)이기 때문에 남두의 육성에서 육을 취해 육당이라고 지었을 뿐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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