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 역사가는 마르크스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서술형 요약
- 최초 등록일
- 2019.04.15
- 최종 저작일
-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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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세기의 부르주아 문화 시대에는 명예롭고 중요한 몇 가지 지적 성과를 이룩하였지만 역사학이라는 학문은 그 성과에 포함되지 않는다.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의 연구와 사례 혹은 19세기 후반의 전문 잡지들에 의해 제시되었던 ‘학문적 역사학’은 비록 신뢰할 수 없는 사실에 의해 지지되는 사건이나 사실이 불충분하게 뒷받침된 일반화를 반대하였다는 점에서는 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의 역사학, 즉 학문적 역사학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그 때문에 특정한 종류의 증거 문서를 평가하거나 평가 기준의 정립, 그리고 이에 필요한 보조적 기술을 제외하고는 역사학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학문적 역사학은 ‘사건사’에 주로 집중했다고 하기 보다는 주로 방법론상 연대기적 서술에 한정하여 적합하였으며 학문적 역사가들의 경우 철학적, 방법론적 측면에 있어서도 놀랄 만한 무지를 드러냈다. 이들의 방법론은 느슨하게 실증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자연과학의 의식적 방법론과 일치하였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① 가정은 ‘사실들’에 대한 연구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한다는 것 ② 설명은 인과 사슬의 집합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견해 ③ 결정론과 진화론 개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이와 같이 수많은 일반 관념 중에서도 대중화된 과학사상을 받아들인 자들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역사에 대한 명확한 진리도 확증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액턴 경이 편집한 『케임브리지 근대사(Cambridge Modern History)』는 그러한 신념에 대한 뒤늦은, 그러나 가장 전형적인 사례였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고려해본다면 역사학은 19세기의 인문, 사회 과학의 최저 기준과 비교해보아도 매우 후진적 분야였으며 인간의 사회, 과거, 현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역사학이 한 기여는 무시해도 될 만큼 부수적인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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