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최고의 금속 공예품: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 최초 등록일
- 2015.11.25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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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작하며
2. 본론
①능산리 고분군 절터 및 공방터
②백제 금동용봉봉래산 향로
ⅰ. 시대적 배경
ⅱ. 향로 외형 분석
ⅲ. 향로에 반영 된 백제의 사상
ⅳ. 백제의 금속 공예
Ⅴ. 중국의 박산향로
3. 마치며
본문내용
1. 시작하며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우리에게 금동대향로로 더 잘 알려진 7세기 초 백제의 유물이다. 지난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 절터의 발굴현장에서 거의 완벽한 형태로 발굴 된 이 금동향로는 극적인 발굴 과정과 더불어 아름다운 외형으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향로의 외부는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장식들의 창의성과 조형성은 백제 미술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의 복합성까지 보여주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백제 금동용봉봉래산 향로는 발굴 이래 동아시아 향로의 역사에서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가장 우수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유물이다.
본 발제에서는 향로의 발굴부터 시대적 배경, 간단한 외형 분석, 향로에 반영된 백제인들의 사상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2. 본론
① 능산리 고분군 절터 및 궁방터
부여 능산리 백제시대 절터는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나성, 사적 제 58호)과 능산리고분군(능산리고분군 사적 제14호)사이의 계곡에 있다. 목탑 중심부의 심초석 위에서 발견된 사리감의 명문에 따르면 절은 567년에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660년 백제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절터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통적인 가람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리감은 능산리 고분군의 주변이 단순한 공방 건물터가 아니라 백제 왕실의 명복을 비는 사찰터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능산리 고분군이 사찰터임을 입증해주는 여러 유물들의 발견으로 인해 백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능산리 고분에 묻힌 자들의 제를 올리는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절의 서실내부에는 온돌시설도 있는데, 그 형태가 고구려 시대에 속하는 만주 집안의 동대자유적과 흡사하여 양 지역간에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절터에서는 공방(工房)시설도 두 군데에서 발견되었는데, 제3건물터의 중앙방의 목곽 수조 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참고 자료
서정록/백제금동대향로: 고대 동북아의 정신세계를 찾아서/학고재/2001
김자림/박산향로를 통해 본 백제금동대향로의 양식적 위치 고찰
최병헌/백제금동대향로의 문화적 배경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