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대군의 세자책봉
- 최초 등록일
- 2014.12.26
- 최종 저작일
- 2013.09
- 1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목차
1. 머리말
2. 봉림대군은 누구인가
3. 봉림대군 세자책봉 당시 사회의 배경과 상황
4. 봉림대군의 세자책봉
5. 맺음말
6. 참고문헌 & 사이트
본문내용
드라마 추노 속에서 봉림대군과 소현세자에 대한 내용이 잠깐 나왔던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없이 보았던 내용이지만 봉림대군의 세자책봉에 관하여 논문을 쓰려고 하는 지금, 잠깐이었던 그 내용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되었고, 그 당시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려 조사를 하였다. 드라마에서도 그렇고 역사속에서도 왠지 봉림대군에 대한 것보단 소현세자와 그의 죽음이 더 많은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봉림대군 즉, 효종은 그저 죽은 형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왕으로써 기억되어져 왔던 것 같다. 서양문물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한다던 소현세자와 오랜 세월을 섬겨온 명나라에 대한 의를 지켜야한다던 봉림대군의 의견차이가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관련하여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 략>
1627년 후금(後金 :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중 략>
한편, 강화부성이 함락될 때 전현직 관료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은 많은 선비들이 순절했고, 부녀자들이 바다에 뛰어들거나 목을 메어 절개를 지켰는데 난이 끝나자 이들의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벼슬을 추증하거나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단(壇)을 설치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또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한 자에게까지 휼전(恤典)을 베풀고 시상했다.
참고 자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1504(네이버지식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6441(네이버지식사전)
조선왕조실록-인조
박시백 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13(군약신강의 나라, 효종 현종실록)> ,2009
글공작소 저, <공부가 되는 조선왕조실록2> ,2011
박안식 저, <소현세자> ,2008
주돈식 저,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2011
박영규 저,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