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시대 무용(춤)과 그 상징에 대한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4.12.13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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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본문
Ⅰ 기독교와 무용(종교무용)
1. 기독교 예배무용
2. 기독교 축제에서 나타나는 무용
Ⅱ. 일반 무용
1.민중무용
2. 귀족무용
3. 특이 형태의 무용(무도병, 죽음의 무도)
[3] 맺음말
본문내용
얼마 전 TV에서 우리나라 무용수가 부채춤을 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 방송을 보면서 춤 안에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해설을 듣고서, 서양 중세에는 어떤 무용이 있었을까, 또 어떤 상징이 담겨있을까 궁금해졌다. 이 당시는 무용의 암흑기라고 여겨지는데, 중세에는 노동을 제외한 몸의 사용을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유가 당시의 사회제도와 종교 등과 연관되어 이를 반영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
<중 략>
앞에서 말했듯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무용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는 무용을 장려하고 신성한 무용을 교회의 종교 의식에 접목시켰다. 이 예배무용은 바실리카 내에서 선도하는 신부와 신자가 더불어 엄숙하게 거행하고 있던 사실에서 무용이 기독교의 제재(題材)에 많이 쓰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금욕을 중시하는 기독교라도 종교의례가 필요했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독교는 무용을 장려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었다. 유태교 또는 그 밖의 이교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무용이 있었고, 그래서 기독교도 처음에는 이교도의 무용습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중 략>
위에서 언급한 민중의 무용은 귀족들의 무용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원래 귀족들은 춤을 추지 않았다. 농토를 직접 관리하지 않았으므로 농사일의 주술도 필요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중세 초기의 제후들은 대지주였다기보다 게르만족의 전사들에 가까웠으므로 무용을 알지 못하였다. 민중과 귀족의 차이는 무용에도 반영이 되었는데, 귀족들의 무용의 자신들의 취미를 반영하는 형태로 개발되어갔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신분을 강조하고 과시하기위해 민중들만 춘다고 생각하는 무용을 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국가가 안정이 되자 전쟁을 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래서 권태를 느끼게 되자 오락거리를 찾게되어 점점 무용에 관심이 가지게 되고, 그 결과로 귀족들은 민중의 무용을 따라 추게 되었다. 귀족들의 시선에서 농민들의 춤은 세속적으로 느껴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