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공화국기 국민회와 대중동원(이승만과 국민회)
- 최초 등록일
- 2014.05.31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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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본 자료는 이승만의 제1공화국 시기, 국민회의 성격과 역할을 설명한 글입니다.
이승만은 해방 후 국민회와 국민반을 조직하고, 국민대회를 개최함으로 자신의 정치 노선을 홍보, 전개해 나가는 수단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본 자료는 대학원에서 발표한 수업자료입니다. 참고자료에 있는 논문을 토대로 정리했습니다.
목차
1. 머리말
2. 국민회의 형성 과정
3. 국민회의 성격
1) 전국적인 조직
2) 반관반민 조직
4. 국민회를 통한 대중 동원과 통제
1) 국민대회
2) 국민반
5. 맺음말-이승만 정권과 전체주의
6.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머리말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남한 단독정부가 출범했다. 해방 후 제헌국회의 권한은 컸다. 국회는 정부통령 선출권을 가지고 있었고, 새 국가에 필요한 각종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 직후 집권여당을 만들어 정국을 운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원외)자유당이 창당되기까지 국회에는 강력한 여당이 형성되지 못했다. 1948년 5․10선거에서 이승만 세력은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이나 김구, 김규식 세력과 비슷한 의석을 차지했을 뿐이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정국운영에도 어려움이 컸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행위처벌법안과 농지개혁법안을 놓고 무소속구락부의 젊은 의원들과 대치했다. 제주도에서는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여수에서는 군의 일부가 제주도 사태 진압을 위한 출병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북한의 남침 위협은 상존했지만 미국의 지지는 불확실했고 제주도와 전라도에서는 좌익 세력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후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다. 국회에서도 이승만 세력은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법과 대통령선거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폭력을 통해 의회를 장악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제주도와 여수·순천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폭력만으로 유지된 것은 아니다. 그는 국민회라는 전국적인 규모의 반관반민 단체를 통해 자신의 정치 노선을 홍보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관철되도록 국민회를 적극 활용하였다.
국민회에 대한 연구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제 시작단계라 할 수 있다. 국민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는 2005년에 발표된 김수자의 「1948-1953년 이승만의 권력강화와 국민회 활용」, 그리고 2006년에 발표된 홍정완의 「정부수립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국민운동 연구」가 대표적이다. 기타 참고할만한 논문은 강행숙의 「제1공화국기 국민회의 조직과 활동」(2009)과 김학재의 「1950년대 국가권력과 행정말단기구-국민반을 통한 감시와 동원」등이 있다.
참고 자료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와 비평사, 2007.
김수자, 「1948-1953년 이승만의 권력강화와 국민회 활용」, 『역사와 현실』 55), 한국역사연구회, 2005.
강행숙, 「제1공화국기 국민회의 조직과 활동」, 숭실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
김학재, 「1950년대 국가권력과 행정말단기구-국민반을 통한 감시와 동원」, 『역사연구』14, 2004.
박균태,「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의 경제부흥 전략」,『세계정치』8, 2007.
서중석, 「한국현대사와 여순사건」, 『여순사건과 대한민국의 형성』,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