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인이 본 한민족의 원류
- 최초 등록일
- 2014.05.24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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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자료의 성격과 논의의 범위
2. 예맥의 세계
3. 한의 세계
4. 기자의 나라 조선
5. ‘동이’의 나라
본문내용
1. 자료의 성격과 논의의 범위
우리 민족이 한자를 빌어 부분적으로나마 문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기원전 이전으로 소급되며, 자신의 전승과 역사를 편찬하기 시작한 것도 기원후 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유기‧신집, 백제의 서기‧백제기‧백제신찬‧백제본기, 신라의 국사 등은 모두 실전되어 현존하는 우리 민족의 최고 사서는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이에 반해서 중국은 기원전 20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문자 생활을 시작했고, 오래된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중국의 기록에는 우리 민족의 기록도 남아 있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초기 우리 민족에 관한 중국측 기록에는 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첫째, 선진(先秦) 문헌은 대부분 그 성립 연대가 분명치 않으며, 대체로 흔히 주장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후대에 속한다. 둘째, 중국측이 기록한 외국 관계의 기사는 주로 중국측의 관심 문제를 중국의 관점에서 기록한 것으로 그 내용은 해당 민족이나 국가의 내부 사정보다 중국과 관련된 외교, 군사에 집중되었고, 부분적인 내부사정에 관한 기록도 ‘외이’를 통어하기 위한 참고 자료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셋째, 주변 민족에 관한 중국측 자료는 중국 정벌군이나 사신이 현지에서 취득한 견문, 중국에 입조한 사행의 보고, 기타 양측 왕래자의(상인, 승려, 표류민 등) 전문으로 분류되는데, 모두 그 성격상 피상성, 부정확성, 특히 과장성을 면하기 어렵다. 넷째, 중국인은 외국의 인명‧지명 등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주로 그 발음을 음역하지만, 때로는 의역뿐 아니라 의역과 음역을 교묘히 결합시키기도 하며, 강한 인상을 주는 풍속이나 특산물을 그 국명이나 지명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고구려‧백제‧신라‧부여‧옥저‧예‧삼한‧위만 조선과 그 이전의 고조선을 우리 민족의 형성 집단으로 보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고로 이 글에서는 필자는 이들 집단과 그 원류가 중국인에게 어떻게 인식, 기록되었는가를 추적하여 그 출현과 활동의 시공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확인하고, 아울러 중국인의 인식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분석하는 것으로 부여된 임무를 마치고자 한다. 이들 집단을 상고 중국인들은 대체로 예맥‧한‧조선‧동이의 범주로 인식했다고 판단되므로, 이하 이 4개의 범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