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자유와 초기 선교활동
- 최초 등록일
- 2013.10.07
- 최종 저작일
-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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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2. 연합활동과 선교 정책
3. 선교의 갈등과 수난
4. 교회의 설립과 사회변화
Ⅲ. 결론
본문내용
(1) 의료선교
언급함 같이 메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하여 허락받은 선교는 의료와 교육이였다.
한국 정부의 태도 그리고 사회적 편견은 공개적인 선교활동의 장애가 되었다. 이에 의료와 교육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북장로회의 의사 알렌 선교사는 1884년 9월 최초 정주 선교사가 되었고, 그해 10월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을 치료함에 고종과 명성황후 및 정부측 인사들의 신임을 얻었고, 살해된 홍영식의 집을 하사받아 1885년 4월 광혜원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 기관은 기독교인이 아니면 치료 받을 수 없다는 의심도 받으나, 선교사업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하면서 의료기관으로서의 역할도 감당했다. 알렌의 인정받음으로 이 병원을 통해 다른 선교사들도 쉽게 선교활동에 착수하였고, 1885년 4월 내한한 언더우드가 교사 자격으로 이곳에 머물며 한국어를 배웠고, 스크랜턴도 1885년 6월까지 의사로 활동 했다. 1885년 여름 헤론이나 1886년 내한한 여의사 엘러즈도 이곳에서 활동 하였다. 이곳은 초기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활동 할 수 있는 공간이였다.
<중 략>
선교의 자유와 초기 선교활동은 한국에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의료와 교육의 선교의 방법은 여러 선교회를 통하여 전해지게 된 것이다. 성경번역과 문서선교는 한국에 상당수의 구도자들을 나타나게 하는 긍정적인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과 교리적 배경을 지닌 교파 형 교회였다. 선교사들은 각국의 선교부의 지휘와 피선교지에서의 협력과 연합을 공존의 길로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선교사연합공의회와 선교지 분할협정이다. 에큐메니컬을 지향(志向)하는 연합공의회는 시도와 호응은 좋았지만 통합방법에 있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또한 선교지역 분할협정으로 선교회간의 마찰과 갈등을 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교회가 설립되어 있는 상태를 보아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대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