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이해] 한국영화의 역사와 발전방향 제시
- 최초 등록일
- 2003.01.01
- 최종 저작일
- 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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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한국영화의 역사
1)초창기와 민족영화의 대두
2)토키등장에서 일본패망까지
3)조국광복에서 한국전쟁까지
4)중흥기의 한국영화
5)시련의 70년대
6)전환과 발전의 80-90년대
2.영화의 미래
3.한국영화의 미래와 발전방향 제시
'6000원과 한국영화의 미래
본문내용
1.한국영화의 역사
한국에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1903년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것이 1897년 또는 1905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한 입증자료는 없다. 그러나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게재된 다음과 같은 광고문은 활동사진의 도래와 유료공개(有料公開) 사실을 완벽하게 입증한다. "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器械廠)에서 시술(施術)하는 활동사진은 일요 및 우천을 제외하고는 매일 하오 8시부터 10시까지 설행(設行)하는데, 대한(大韓) 및 구미 각국의 생명도시(生命都市)의 절승(絶勝)한 광경이 구비 하외다. 입장요금 동전 10전". 그리고 이에 뒤이어 원각사(圓覺社)·활동사진관람소 등에서도 영화가 잇달아 공개되었다. 공개된 작품들은 초기의 시네마토그라프와 바이타스코프의 단편 필름들이었다. 1910년을 고비로 서울에는 활동사진을 상설 상영하는 극장이 속출함에 따라 극장가(劇場街)가 형성되었으며, 장안의 큰 인기를 모으는 가운데 그 흥행이 본격화하면서 1920년대 초까지는 전국에 확산되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영화의 전사기(前史期)는 1903년부터 1919년까지의 16년간이며 구미 각국의 영화가 수입되어 한국의 대중들에게 배일적(排日的)이며 구미의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깨우치는 역할도 매우 컸다. 이 기간은 또 한국영화계의 개척자들에게 영화에의 의욕과 영화인으로서의 등장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기도 하였다. 1919년 10월 27일 김도산(金陶山)이 이끌던 신극좌(新劇座)가 무대와 스크린을 연결한 연쇄극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를 단성사(團成社)에서 공개하였다. 비록 연극 막간에 삽입되어 스크린에 영사된 것이기는 했지만 이때 필름에 촬영된 활동사진은 한국 최초의 영화제작이었다. 그래서 한국영화사(韓國映畵史)는 최초로 필름이 제작·공개된 이날을 기점(起點)으로 잡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