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後百濟 건설 속의 甄萱
3. 甄萱의 出身地 論爭
1) 尙州出身說
2) 光州出身說
4. 出身地 論爭의 종합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新羅下待는 9세기 말에 들어서며 혼란이 격화되면서 사회붕괴현상, 즉 말기적인 현상을 보이게 된다. 이는 憲康王, 眞聖女王대의 사치, 향락에 따른 정치적 분열과 농민수탈강화에 의한 농민 이반이 결국 대규모 조직적인 농민반란으로 연결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농민반란은 그 대표자를 띄게 되었으며 북원의 梁吉, 철원의 弓裔, 죽주의 箕萱, 그리고 완산의 甄萱 등이 반란의 대표자로서 나타났다. 이들의 농민반란은 신라하대의 총체적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한 신라사회의 해체를 촉진하여 40여년에 걸친 후삼국시대의 분열사회를 가지고 왔다. 특히 이는 다시 예전의 高句麗, 百濟의 이름을 이으며 지역거점세력에 의해 분열되고 새로운 과거 역사의 재현 속에 그 분열과 대립은 가속화할 수 있었다.
특히 견훤은 옛 百濟의 남쪽 지역 호족과 농민들을 武珍州에서 규합하고 백제를 다시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전주를 거점으로 900년에 後百濟를 다시 건국하였다. 이러한 후백제는 비록 짧은 시간 존재하였지만 그 시간 속에서 국가체를 구성하고 대외관계를 강화하며 그와 동시에 대립과 경쟁을 통한 통일을 지향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견훤 한사람의 업적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훤은 왕건에게 밀리며 역사의 패자로 인식되었고 한 국가의 왕으로 군림하였지만 출신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는 등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그리하여 이 글을 통하여 후백제 속의 견훤의 모습과 그의 출신지 논쟁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2. 後百濟 건설 속의 甄萱
먼저 후백제의 건설에 앞서 견훤의 모습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견훤이 西南海 방면에서 防戍의 근무를 할 때 당시 사회붕괴현상으로 일어난 지방 농민반란을 적절히 이용한 점이다. 이는 『三國史記』견훤전에서도 잘 나타나며 도적떼가 벌처럼 일어나고 그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의 서남쪽 주현을 공격, 호응을 받아 열흘이나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명에 이르렀다고 나타내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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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史綱目』
『三國史記』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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