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인물 조사 / 박영효 인물조사 레포트
- 최초 등록일
- 2012.11.06
- 최종 저작일
- 2010.06
- 7페이지/ MS 워드
- 가격 1,500원
소개글
교양시간에 제출했던 레포트입니다.
논문과 관련도서 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여 쓴거라,
일반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내용보다는 더 구체적이예요
목차
1. 박영효의 성장배경과 갑신정변 주도 개화파의 형성
2. 수신사로서의 방일활동과 개화파의 외교활동
3. 갑신정변과 일본망명
4. 갑오개혁과 두번째 일본망명
5. 박영효의 재귀국과 이후 활동
본문내용
우리는 박영효를 비롯한 갑신정변 주도 개화파를 친일파, 또는 일본인을 끌어들인 외세의존적인 정치가로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한일간 문화적, 정치적 교류 확대에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근대화를 위한 개혁구상과 외교활동 과정에서 일본과의 교류에 그들이 어떠한 비중을 차지했는가 알아보고자 한다. 당시 개화파가 조선의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위해 일본을 경유하여 서구 문물을 수용하며, 일본을 통해 조선에서 청국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던 급진개화파의 노력을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영효가 말년에 했던 친일행위로 인하여 역사에 지우지못할 친일파라는 흔적을 남겼지만, 조선 합병 이전에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조선의 근대화와 개화사상은 다시금 평가받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 중 략 >
4. 갑오개혁과 두번째 일본망명
박영효는 일본에 망명한지 10년만인 1894년에 간신히 귀국하였다. 조선에서는 그의 귀국을 반대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으나, 당시 마침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또한 공사로 부임하게 된 이노우에의 도움을 받아 정계복귀에 성공하였다. 마침내 박영효는 김홍집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입각하였고 이것이 제2차 김홍집내각이다.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박영효는 귀국 직후 대원군에게 접근하였는데, 두사람의 결탁을 두려워한 민비가 박영효를 적극 회유하였다고 한다. 즉 실제로 박영효가 갑오개혁 과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은 이노우에 뿐만 아니라 민비의 지원도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영효는 일본과 민비의 지원을 배경으로 각종 개혁안을 과감히 밀어붙였는데, 근대 문명국가를 지향하는 각종 개혁조치를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박영효는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고, 총리대신을 맡고있던 김홍집을 비슷한 많은 대신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노우에가 일시귀국했을때 독자노선을 강화함으로써 일본의 경계심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왕실과 민비와도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어 실각을 자초하였다.
참고 자료
<개화파열전 : 김옥균에서 김가진까지> 신동준 지음, 푸른역사(2009)
<한국의 인물과 사상 : 박영효 연구> 유병용 외 지음, 한국정신문화연구원(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