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의 사회와 사학
- 최초 등록일
- 2002.11.27
- 최종 저작일
-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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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요 금 원(遼 金 元) 시대의 사학 개요
▣ 송 요 금사의 편찬
▣ 사찬 (私撰) : 북방 민족사의 편찬
▣ 마단임의 『문헌통고(文獻通考)』
▣ 『경세대전(經世大典)』·『원장전(元章典)』의 편찬
▣ 통감학의 발전과 호삼성주(胡三省注)
▣ 원대(元代)의 농업사(農業史), 농서(農書)의 간행
▣ 명대의 사회와 사학
▣ 명후기 개인사서 (*참조자료)
▣ 왕세정(王世貞)과 이지(李贄)의 사학
▣ 방지(方志)와 경제사(經濟史)
▣ 민간사학(民間史學)의 잡사(雜史)와 필기(筆記) 소설(小說)
▣ 농업, 약학, 기술서의 편찬
본문내용
▣ 요 금 원(遼 金 元) 시대의 사학 개요
요 금 원 시대는 북방 민족이 중국을 지배하였던 시대로 이른바 '정복 왕조'라고도 부른다. 야율아보기가 요를 건국했던 때부터 원의 순제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500년에 가까운 시기이다. 이들 북방 민족은 건국 이전에 문자도 없었다가 건국 후에 각기 문자를 만들었으나 중국 문화와 접해 있고 또 중국을 지배하다 보니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요 금은 중국 문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요 태조 때 중국의 제도를 받아 들여 감수국사의 관직을 설치하고, 야율노불고를 임명하였다. 경종 건형(乾亨)초에 한인 실방(室昉)을 감수국사로 임명하였으며, 성종때부터 오대와 송의 사서 편찬 체제를 모방하여 국사원(國史院)과 기거사인원(起居舍人院)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성종 때부터 『일력(日曆)』과 기거주(起居注)』도 편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하였다.이는 요 국사의 일부분인 셈이다. 요는 관례상 황제가 기거주를 열람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도종 태강 2년(1076)에 황제가 기거주를 보려고 하여 이를 거부하다가 수주랑(修注郞)이 올리지 않아 각각 장(杖) 200을 맞은 일이 있었다. 도종은 사관이 조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여 사관은 퇴근한 재상에게 물어서 그날의 기거주를 썼다. 뿐만 아니라 저술도 국내에서만 간행하도록 하여 나라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금지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