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전 한국건축사
- 최초 등록일
- 2011.10.11
- 최종 저작일
- 2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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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정전 답사보고서
목차
Ι. 文 化 遺 蹟 調 査 書
Ⅱ. 古 建 築 調 査 書
Ⅲ. 建 築 歷 史 環 境
본문내용
관 련 사 건
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조선 전기에 한양천도가 있던 때로 태종이 즉위하여 도성을 한양으로 다시 옮기면서 동시에 이궁의 조성을 명하여 1405년(태종 5)에 완성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은 전소되었는데, 이때는 경복궁·창경궁 등 조선왕조의 3대궁궐이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다. 세 궁궐 중 창덕궁은 가장 먼저 복구에 착수되어 1609년(광해군 1)에 중건되었다. 곧이어 창경궁도 복구되었지만 경복궁만은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7년(고종 4)에 가서야 중건되었다. 따라서, 창덕궁은 임진왜란 뒤 중건되면서부터는 조선왕조의 법궁으로서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치르는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다.
창덕궁은 조선 후기의 정궁의 구실을 하게 됨에 따라 나라의 큰 사건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부주의 등으로 인한 화재가 잦았는데 이때마다 오래지 않아 복구가 이루어져 대체로 본래의 궁의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중요한 사건과 화재 등을 살펴보면, 먼저 광해군 말에 일어난 인조반정을 들 수 있다.
당시 반정군이 왕을 수색하기 위하여 횃불을 들고 내전에 들어갔다가 실화하여 내전의 대부분과 외전의 일부를 불태우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창덕궁은 정전인 인정전과 주변의 몇몇 건물만 남겨놓고 많은 부분이 잿더미로 변하였다.
그러고 나서 25년이 지난 1647년(인조 25)에 다시 옛모습으로 복구되었다. 그 뒤로 창덕궁에서는 효종·현종·영조가 즉위식을 가졌고, 크고작은 정사가 모두 이 궁에서 이루어졌으며, 영조 때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참사가 이 궁내에서 일어났다.
창덕궁의 내전은 왕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서 부주의로 인한 화재도 가끔 발생하였는데, 그중 큰 화재는 1833년(순조 33)과 1917년에 일어났다. 이 두 번의 큰 화재는 모두 내전에서 일어나 정침인 대조전을 비롯한 주변 전각을 모두 불태웠다.
순조 때에는 불이 난 이듬해에 건물이 다시 복구되었으며, 1917년의 화재 때에도 2년 뒤에 복구되었는데 특히 1919년의 복구는 민족항일기에 이루어지면서 경복궁의 내전 건물들을 뜯어다 다시 짓고 일부 건물은 형태나 규모를 그 전과 다르게 개조하고 내부를 양식(洋式)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를 강점한 지 2년 뒤인 1912년에 창경궁과 함께 창덕궁의 인정전과 후원을 일반에게 관람하도록 하여 조선왕조의 궁궐의 위엄을 떨어뜨렸다. 광복 후 창덕궁은 시민에게 개방되었으며 1980년에는 그 동안 훼손되었던 궁내시설을 정비하고 궁의 관람을 제한하여 옛 궁궐의 면모를 지켜나가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