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시기의 농민과 징세 및 국민당 지배
- 최초 등록일
- 2011.10.05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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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 농민생활에 영향을 준 경제동향
항일전이 시작된 두 해 동안 실질적으로 모든 농민들이 비교적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1940년부터 농촌에서의 전통적 빈부의 차이는 넓어져 갔다. 이 같은 농촌인구의 경제적 양극화는 역설적으로 농산물가격의 급격한 상승 때문이었다. 호북성, 호남성에서 사천으로 수송하는 전송(轉送)지점인 의창이 일본군에게 함락되면서 미곡공급감소 현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쌀값의 상승은 대지주와 소작인의 경제적 양극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 같은 경제적 동향 때문에 1942년과 1943년에 지주 ․ 소작인의 분규가 만연하였다.
목차
1. 농민생활에 영향을 준 경제동향
2. 전부(田賦)
3. 잡부금, 군량(軍糧) 그 밖의 강제 부담
4. 농민의 조세(租稅)부담
5. 경제적 영향과 정치적 반응
본문내용
항일전시기(抗日戰時期)의 농민(農民)과 징세(徵稅) 및 국민당지배(國民黨支配)
1. 농민생활에 영향을 준 경제동향
항일전이 시작된 두 해 동안 실질적으로 모든 농민들이 비교적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1940년부터 농촌에서의 전통적 빈부의 차이는 넓어져 갔다. 이 같은 농촌인구의 경제적 양극화는 역설적으로 농산물가격의 급격한 상승 때문이었다. 호북성, 호남성에서 사천으로 수송하는 전송(轉送)지점인 의창이 일본군에게 함락되면서 미곡공급감소 현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쌀값의 상승은 대지주와 소작인의 경제적 양극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 같은 경제적 동향 때문에 1942년과 1943년에 지주 소작인의 분규가 만연하였다.
2. 전부(田賦)
1928년 이래로 정세(正稅)와 그와 관련된 부가세(府加稅)는 성과 현의 정부에서 관리되었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오지로 철수한 이래 지출에 비해 세수가 늘지 않았고, 미곡시장의 위기는 군량미 등 필요한 양곡의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1940년 7월 산서성을 시작으로 1941년 봄에 중앙정부는 전부를 국유화하여 현물로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전부가 국세화되면서 지방행정 단위는 필요한 곡물수입을 얻고자 여러 가지 잡부금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전부에 가징(加徵)되는 가장 큰 강제징수는 곡물의 강제구매와 곡물의 강제차용이었는데, 실질적인 보상이 이뤄져야 하는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리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강탈의 개념에 더 가까웠다. 이외에도 농민들은 이 같은 현물납부나 부과를 정부수매장까지 운송해가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납세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 노력은 농민은 감당해야 했다.
참고 자료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