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오대문학
- 최초 등록일
- 2010.06.25
- 최종 저작일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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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치상에서부터 고려할 때, 그들은 협애한 소위 `이하지별(夷夏之別)`을 더욱 타파할 필요가 있었다. 이세민은 당조의 황제로서 또한 서북 제민족(諸民族)의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존칭을 받아왔었다. 그는 성공의 원인에 대해 자술할 때에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한족(漢族)과 비한족(非漢族) 인사들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당조 정권 중에 `호인(胡人)`이 높은 관직의 장령(將領)이나 지방장관(地方長官) 및 재상(宰相)을 담임한 현상은 아주 보편적인 것이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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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북방에서는 대량의 소수민족들의 중원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는 벌써 수백년이라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이들 소수민족들은 비록 일부 전통적 풍습을 유지하긴 하였으나 이미 한족(漢族)에 동화된 정도가 심하다. 이러한 시기에야 말로 다민족 융합의 통치를 건립할 가능성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李唐皇室은 원래 선비 귀족과 아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고(이연(李淵)의 모친 독고씨와 이세민(李世民)의 황후 장손씨는 모두 선비인(鮮卑人)이었다), 정치상에서부터 고려할 때, 그들은 협애한 소위 `이하지별(夷夏之別)`을 더욱 타파할 필요가 있었다. 이세민은 당조의 황제로서 또한 서북 제민족(諸民族)의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존칭을 받아왔었다. 그는 성공의 원인에 대해 자술할 때에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한족(漢族)과 비한족(非漢族) 인사들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당조 정권 중에 `호인(胡人)`이 높은 관직의 장령(將領)이나 지방장관(地方長官) 및 재상(宰相)을 담임한 현상은 아주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는 민족의 대융합을 진일보 가속화 하였으며, 중화의 문화에 신선한 혈액(血液)을 주입하였다.
강대하고 웅대한 당대(唐代) 사회는 중외 문화교류 면에서 고도의 자신감과 개방성을 나타내었다. 한편으로 당제국은 당시 세계 선진대국으로서 그 문화는 당나라로 온 대량의 여러나라 대신과 유학생, 상인에 의해 외국으로 전파되어 갔으며 중국 주변에서 하나의 커다란 한문화권(漢文化圈)(일본문화의 한화(漢化)는 특출한 예이다)을 형성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나라 사람들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고 당나라의 국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 멀리 불경을 구하러 다니는 스님들을 통하여 대량의 외국의 문화를 흡수하였다. 종교 방면에서, 불교가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배화교, 마니교, 이슬람교도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중국의 전통 음악, 회화, 춤, 조각 및 일상 복식, 음식 등도 이민족 문화의 영향을 접수한 까닭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외래 문화를 좋아하는 것은 심지어 사회의 유행으로 되었고, 호주(胡酒), 호악(胡樂), 호무(胡舞), 호복(胡服) 등은 자랑 거리로 되었다.
한마디로, 남북문화, 국내외 각 민족의 문화와 중외문화의 교류, 상호 융합과 쓸모없는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찾아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당대 문화로 하여금 생기있고,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새롭고 변화가 많은 면모를 가져오게 하였다.
당대 사회의 정치 구조는 위진남북조에서처럼 귀족 계급의 사족들이 충분한 특권을 향유하고 있는 것과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송대 이후에서처럼 사족이 완전히 다시 존재하지 않고 황권이 국가 권력의 절대적인 중심으로 되는 것과도 다르다. 당대 사회는 이 두 가지 사이에 놓인 과도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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