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비친 우리의 고대문화
- 최초 등록일
- 2010.01.12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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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부경대 "유물로 본 우리의 고대문화" 수업에 제출했던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 입니다.
언론에 비친 “풍납토성”발굴에 대한 여러 시각차이를 분석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서 론
2. 한성백제와 풍납토성
3. 학계의 시각
4. 지역간의 시각 차이
5. 문화재 보호에 관한 시각 및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우리나라 고고학에 대해 뉴스 검색을 하던 중 강의에도 언급되었었던 “풍납토성”에 관한 기사를 접하였다. 그 기사는 2009년 11월 26일에 나온 것으로써 각종 방송사를 비롯한 무수한 언론매체에서 보도를 했던 내용이었다. 풍납토성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에 가장 오래된 주거지와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기사 였다. 그런데 각종 언론매체의 이 기사의 내용서두 부분에는 모두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 이라는 문구가 따라다녔다. 풍납토성이 발견된 자리가 이제는 한성백제기의 도읍으로 확실해진 것 인지 궁금하여 여러 기사를 다시 검색 하면서, 풍납토성 발굴에 관한 여러 학계의 시각 차이와, 발굴조사단과 주거주민과의 충돌에 관한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주제를 “풍납토성 발굴”에 관한 여러 시각들을 알아보고 이것을 바라보는 대중들이 시각도 정리해 보려한다.
2. 한성백제와 풍납토성
먼저 한성백제와 풍납토성 발견에 대한 설명을 하겠다. 한성백제기는 백제가 건국된 때부터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 즉 하남위례성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500년간(BC18 ~ AD475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신라와 고구려의 초기 도성들은 발견했었으나 백제만큼은 초기의 도성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와 몽촌토성 및 풍납토성중 한곳 이라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1925년 홍수때 처음 드러난 풍납토성에서 1997년 아파트 재개발 공사를 계기로 많은 유적이 나오며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풍납토성이 한성백제기의 도읍인 하남위례성의 도성이라는 설이 확실시 되다시피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학계과 관심과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풍납토성을 처음 발굴할 당시의 기사이다.
“풍납토성 백제 첫 왕성 확실”
[경향신문]1997-12-08 16면 1171자 문화 기획,연재
◎도랑·부뚜막 등도 발견 초기 한성시대것 추정/“대규모 주거시설 밀집 초기백제 귀중한 사료”/문화재연구소 윤근일연구관풍납토성이 베일에 싸인 백제 초기의 역사를 풀어줄 열쇠로 떠올랐다.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풍납토성에서 백제초기(한성시대·기원전 18년∼기원후475년) 집자리와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형태의 기와 등이 출토됐다.
이는 지난 4월 토성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백제 유적에 이은 또다른 쾌거라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6일 「풍납동 긴급발굴 조사단」(단장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따르면 서울 송파구 풍납동 246의 3 일대 풍납동 제1지구 재개발아파트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백제초기 집자리 8기, 이형기와, 토기 파편, 철기류 등 유물이 대량 발굴됐다. 지난 7월 발굴조사없이 아파트공사가 시작돼 긴급 구성된 발굴 조사단은 시굴조사에 이어 유물포함층이 살아있는 900평에 대해 10월부터 정밀 발굴을 해왔다.
이번에 발굴된 8기의 집자리중 2곳은 남아있는 축이 각각 8.5∼10m, 9∼11m이며 내부에서 기와조각들이 많이 출토됐다. 또 각각 20여개의 기둥구멍과 구멍내부에서 기둥받침돌이 확인됐다. 이들 집자리엔 단단히 다져진 바닥에 목탄들이 많이 깔려있어 집은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 곳의 집자리에는 2개의 커다란 판석을 세워 양벽을 막은 부뚜막이 항아리 조각들과 함께 발견됐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