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인천의 역사
- 최초 등록일
- 2009.10.12
- 최종 저작일
- 2008.10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조선후기 지방 군현의 역사중
인천의 역사를 조사하였다
목차
서론
본론
1.인천의 건치연혁
2.인천의 경제
3.인천의 군현제
4.인천의 군사시설
5.인천의 향교
6.인천의 사회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론
필자는 인천에서 자란지 오래되어 이번 주어진 과제를 받고 인천의 역사와 조선후기 사정을 알고 싶어서 인천을 채택하였다. 당시 조선후기 인천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인천시 사(史)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고서를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인천광역시 홈페이지에 있는 여러 인천역사에 관한 자료를 참고하였다.
본론
1. 인천의 건치 연혁
본래 인천은 마한의 북부지역이었으나, 동진 초기에 백제가 마한을 통일하자 인천은 백제의 북부지역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450년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에서 백제가 수도인 한성이 몰락당하여 한강 유역의 땅은 모두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인천은 고구려의 남부지역에 속한다. 이때 인천의 이름은 미추홀 또는 매소홀현이 된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인천은 신라의 영토에 포함이 되어 신라 경덕왕이 소성(邵城)으로 고치어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때에는 수주(樹州)에 붙였고, 숙종 때에 인예왕후 이씨의 본관이었기 때문에 경원군으로 승격하였다. 태조 원년에 인주(仁州)로 만들었고, 태종 13년에 지금의 인천(仁川)이 되었다.
2. 인천의 경제
조선후기 당시 인천의 양역은 2필, 결역․호역의 잡비로 1결에 3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 9년에 양역을 2필에서 1필로 결역․호역의 잡비를 1호당 1결로 받고자 하였다. 또한 환곡을 처리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일과 수군의 부역과 결부되어 농민은 고통을 받고 있다. 또한 균역청에서 쌀을 무역하고 농우를 함부로 도살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연전에 경지를 측량할때에 묵밭에 대한 부세를 감면하였으나 당시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서는 늘려서 책정하였다. 그 책정된 숫자가 너무 중해서 백성이 전지를 버리고 경작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참고 자료
이행 외,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http://main.incheon.go.kr/engine/isapi/frame.dll?bc=240&co=incheon&ul=ko 「인천의 역사와 문화」, 인천시사편찬위원회, 2007
http://main.incheon.go.kr/engine/isapi/frame.dll?bc=237&co=incheon&ul=ko 「인천사 자료집」,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7
김정호, 「대동지지」, 조선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