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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화원 정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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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화원의 역할
2. 조선 후기와 그 이후의 화원제도와 운영
3. 조선후기~말리 대표적인 화원가문
본문내용
畵員은 조선 초기 畫師(畫史, 畵士), 畵工 등 나라에 소속되지 않은 민간 화가들을 일컫는 용어와 함께 쓰였고, 지방의 관청에 소속된 화가 역시 화원으로 불렸으며, 사찰의 불화 제작에 참여한 畵僧을 가리켜 화원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관원화가에 대한 관찬 기록상에는 태종 17년인 1417년 4월 2일자 태종실록에 처음 등장하여 대한제국기인 1908년에 사라진다. 이들은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국역 또는 관역뿐만 아니라, 사적인 주문에도 응하며 각 시기의 회화사에 전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한 중국과 일본 사신의 요청이나 예물용 그림등의 제작과 사절단의 수행화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아시아 회화교류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이들은 중국사신을 포함한 왕실 및 종실과 사대부들의 수많은 공적‧사적 요청과 감계화에서 춘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요에 응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화원들은 상고 양식의 계승 및 보존과 실물처럼 방물하게 묘사해 내는 기법의 개발, 의경을 반영하는 문인화풍의 수용 등을 통해 궁화와 초상화, 풍속화, 실경산수화를 비롯한 수준 높은 작품들을 산출해 냈다.
화원의 직무에 관해서는 고종 6년(1867년)에 간행된 육전조례의 「도화서」 조항에 ‘模寫’, ‘進上’, ‘分差’로 나뉘어 명기되어 있다. 모사는 형상의 본을 뜨거나 轉移하기 위해 긋고 그리고 칠하는 행위 전반을 뜻한다. ‘모사’에서는 10년에 한 번씩 왕의 초상을 그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 제일 먼저 수록되어 있다. 10년에 한번 씩 어진을 도사하기 시작한 것은 영조때 부터 (영조9년(1733년)으로 추정)이다. 어진화사는 대개 도화서 화원이나 지방 출신의 화사, 그리고 정조 대 이후에는 차비대령화원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들은 신분상 중인이나, 어진을 완성하고 나면 그 공로로 지방관 등의 관직에 임명되어 신분과 지위의 상승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 어진화사는 주관화사, 동참화사, 수종화사로 구분할 수 있다. 주관화사는 어진의 草를 잡고 주로 얼굴을 담당해 그렸으며, 동참화사는 주관화사를 도와서 의복 등 주요하지 않는 부분과 채색하는 일을 맡았고, 수종화사는 보조 역할을 하며 채색하는 일을 도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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