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김득신이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또 고문을 외우고 있구먼!’ 이라 했을 정도이다. 김득신에 대한 에피소드는 또 있다. ... 김득신은 그제서야 1억1만3천 번 읽었던 '백이전'인 것을 알았다. 김득신은 자신의 아둔함에 굴하지 않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책을 자신의 몸으로 만들었으니 놀라울 뿐이다. ... 김득신은 ‘바람 부는 가지에 새의 꿈이 위태롭고’ 란 한 구절을 얻었다.
김홍도의 화폭은 김득신(1754~1822)에게 계승되어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 김홍도와 김득신은 서민생활의 갖가지 세세하고 다채로운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어 왕과 사대부는 물론 서민들에 이르기 까지 애호되었다. ... 이런 그림들이야 말로 우리가 가슴으로 이해하는 풍속화 중의 풍속화라 여겨진다. (2) 김홍도와 김득신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멋과 분위기를 담은 풍속화를 재작한
내 마음은 김득신을 옹호하고 있는데 내 머리는 김득신은 오늘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 이런 내 개인적인 관점을 버리고 냉정하게 오늘날 내가 배우고 있는 경영학이라는 관점으로 김득신을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만큼 한심한 사람이 있을까?
김응환은 김홍도의 후배이자 제자였던 김득신의 작은아버지다. 김홍도보다 18살이 많던 김응환이 왕명으로 금강산에 들어가를 그려 바친 일이 있다. ... 신윤복은 남녀의 성정을 노출시킨 소재나 기방의 유흥과 여성 생활상을 낱낱이 포착하여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또 다른 회화사적 업적을 달성하였다.
김득신은 같은 주제를 그려도 김홍도와 달리 집안 정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또 별도로 흩어진 화첩용 그림들이 비교적 여러 점 남아 있는 편이어서 풍속화가로서 김득신의 위치를 충분히 검증케 해준다. ... 풍속화가 ①윤두서 나물캐는두여인 낮잠 조선 후기 풍속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 화원 화가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되는데, 17, 18세기까지 거슬러
김득신의 한편 19세기에 이르러 풍속화는 김정희 등 청대 고증학에 근원을 둔 새로운 문인화풍의 강세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든다. ... 이 두 거장과 함께 삼대 풍속 화가로 꼽히는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김홍도와 친연성이 큰 풍속화첩과 병풍류를 남기고 있으며 몇 가지 주제를 함께 다룬 정형화된 양상을
서민들의 생활의 전경을 주로 해학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는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가 있다. 김홍도는 산수, 영모, 화조화 등에 모두 능한 화가였다. ... 산수화는 사실묘사와 조국애가 어울려서 조국 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으로 당시의 신윤복(申潤福)·이인문(李寅文)·김석신(金碩臣)·김득신(金得臣)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긍재 김득신(兢齋 金得臣 1754~1822) 그림 《파적도》김득신 앞의 두 거장과 더불어 삼대 풍속화가로 꼽히는 김득신은 김홍도의 영향이 짙은 풍속화첩)과 병풍류를 남기고 있지만, ... 이러한 김득신의 형식화는 김홍도가 말년에 관념화로 기울면서도 그 인생관에 걸맞은 무르익은 예술성을 구가하였음과도 잘 비교된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