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일본기독교연맹 산하로 들어가면서 기독교의 친일화는 활발히 진행 변절친일파의 모습과 행태 1 최린 – 민족반역행위 핵심 천도교인사 2 최남선 – 역사 앞에 죄를 지은 역사가 3 정춘수 ... -- * Part 3 친일파의 변절과 그 논리 잡지 「 동명 」 을 발행 하면서 자치운동을 주장 , 일제와 타협 식민주의 역사학의 한국사 왜곡에 참여 변절친일파의 모습과 행태 3 정춘수
대표적 인물로 천도교 지도자인 최린, 감리교 정춘수 목사, YMCA 간사 박희도 등이다. ... 동경 YMCA였다. ③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길선주, 이필주, 김병조, 김창준, 양전백,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화영, 정춘수
이러한 친구의 변절을 지켜보다 못한 신석구 목사는 1944년 여름 소고기 두 근을 들고 정춘수의 집을 찾아갔지만 정춘수는 신석구 목사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 그렇게 된 데에는 일제의 강압적 종교 통제가 극에 달했던 시대적 환경도 있었지만 정춘수 목사에게 문제가 있었다. 감독이 된 정춘수 목사는 적극적으로 일본 정부를 도왔기 때문이다. ... 그 후에 같은 고향 출신인 정춘수를 만나 개성으로 들어가 병원일을 하면서 환자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하였다.
기독교의 자유(自由)사상이 독립운동의 불을 지피다 1919년 3월1일 오후2시 민족대표 29인(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목사는 지방부흥회 인도로 현장에 참석하지못했음)은 인사동 ... 정춘수, 곽명리 등이 중심이 된 원산에서는 2천여 군중이 모인 연설대회에 이어 악대를 앞세운 시위대가 만세를 불렀고, 2일 평양에서는 계속해 감규찬 김선두 목사 등 30여 명이 붙잡혀
한편 기독교계 친일어용단체의 등장은 교회를 더욱 분열시키고 교도의 친일화를 획책하였다. 1938년 5월 기독교단의 지도자들이 망라되어(정춘수, 김종우, 김우현, 차재명, 이명직, 윤치호 ...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9년 9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된 정춘수는 1940년 10월 총리원 이사회에서 경찰당국의 위임장을 제시하면서 이사들을 위협하는 가운데 감리교혁신안을 ...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기로 의결한 후 각 노회별로 지부연맹을 만들어 부일협력에 나섰으며 1939년 10월에는 한국감리교회를 일본 감리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정춘수가
기독교 ※기여도에 따른 등급 A 이승훈 B 박희도, 이갑성, 양전백 C 길선우, 이필주, 김창준, 유여대, 이명용,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최성모, 김병조, 오화영, 정춘수 ※출신 ... (괄호 안은 거사 전 활동지역) 평안도 이승훈, 양전백, 길선우, 김창준(서울), 유여대, 이명룡 서울 이필주, 박동완, 오화영, 최성모 충청도 신홍식(평양), 신석구(서울), 정춘수